대통령으로부터 촉발된 국정농단 때문에 한국교회도 두 갈래로 양분화되었다. 희한한 현상은 서로 다른 의견을 말하면서도 그 기준이 똑같이 법치와 성경이라는 점이다. 한쪽은 법을 어긴 대통령이 퇴진해야 한다는데, 다른 한쪽은 대통령의 퇴진이 위법이라고 강변한다. 어떤 이는 성경의 가르침이 정의라고 외치는데, 다른 이는 성경의 핵심이 용서라는 반론을 펼친다. 동일한 기준을 가지고 상반된 말이 나오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다.

법치의 정확한 내용은 무엇일까? 동양의 법치사상은 극심한 혼란기였던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한비자(韓非子)로부터 나온다. 한비자는 혈연, 지연, 학연 등을 매개로 형성되었던 구시대의 연고주의 도덕체계 대신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공명정대한 사회원리로 법치를 내세웠다. 따라서 법치는 권력자와 특권층의 편의에 따라 취사선택되는 도덕의 폐단을 엄금하고, 모든 구성원들의 공평한 삶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이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기원한 서양의 법치사상도 권력을 소유한 통치자의 자의적인 지배를 배격하고 합리적 규칙에 의해 공정한 사회협동체계 구성을 지향한다. 이 원리에 따라 법치는 자기방어수단이 부족한 다수 시민들을 보호하는 최고의 견제수단으로 작용한다.

예수님의 복음을 통해 재해석된 율법 역시 모세의 권위를 이용한 종교적 특권의 정당화를 배격하고,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존엄성과 가치를 지닌다는 율법의 본래 정신회복에 초점을 맞추었다. 결국 법치와 관련된 동서양과 성경의 가르침은 법치의 근본정신이 권력자의 부정부패 비호 수단이 아니라, 그들의 타락과 행악을 견제하여 다수 구성원들을 보호하는 장치라는 점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성경이 말하는 용서는 또 어떤가? 죄 없는 자가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는 요한복음 8장을 보자. 신명기 22장 22절과 레위기 20장 10절은 간음죄를 저지른 남자와 여자 모두를 돌로 쳐 죽이라고 명령했지만 본문에는 여인만 끌려온 것으로 묘사된다.

죄인 사이에도 우열을 나누는 불공정 상황에서 그녀는 처형에 앞서 극단적인 인격살인을 먼저 당한다. 예수님은 절대 약자인 그녀를 위한 용서를 요청하지만 여인의 죄가 아무 여과 장치 없이 무작정 용서받지는 않는다. “다시는 그런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 여인의 죄는 여전히 유효하며 반드시 본인이 해결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선포된다.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 용서하라’는 마태복음 18장 내용도 자기가 받은 용서를 망각하고 이익을 위해 자신보다 약한 남을 희생시키는 악한 종의 이야기와 연결된다. 즉 자신에게만 관대한 권력자의 이기적인 자기용서는 오히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 대상임을 명백히 밝히는 셈이다.

동일한 원리로 피지배종족에 대한 무자비하고 차별적인 처벌방식이었던 십자가 역시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이 먼저 선행되었기 때문에 사랑과 평화의 상징으로 전환되었다. 그 정신을 잘 아는 존 크리소스톰은 탐욕을 채우려고 평민을 착취하는 모든 권력자와 부유층을 악마에게 놀아나는 이들이라고 비판하면서, 모든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라고 외쳤다. 

법치와 성경의 용서는 권력자들의 이기적 욕망과 자의적인 부정부패를 용납하지 않는다. 오히려 법치와 성경은 회개 없이 용서를 남발하는 이들에 대한 분노와 심판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그럼에도 교회 일각에서 법치와 용서를 이유로 타락한 권력자를 비호하는 의견이 제기됨은 심히 유감이다. 이런 생각은 법치와 성경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총체적 오류이며, 권력에 대한 동경 내지 불공정한 현실과 타협하는 편의주의적 발상이다.

사회의 비판과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 한국교회의 회복을 위해서라도 부패한 권력자의 안위보다 약자의 상처와 고통에 먼저 관심을 가져야한다. 그리고 그를 용서하자는 이유가 법치와 성경의 용서 까닭인지 아니면 혹시 부와 권력을 부러워하는 내면의 잠재된 욕망 때문인지 냉정하게 자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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