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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산되는 루터 종교개혁, 독일 땅을 바꾸다
개신교회 독일을 근거지로 삼다
[1066호] 2016년 11월 23일 (수) 15:59:06 조재석 기자 chojaeseuk@gmail.com

   
▲ 토르가우성, 뒤편에는 엘베강이 흐르고 있다.
보름스 제국의회(1521년)에 당당히 섰던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어 10개월 동안 ‘융커 요어그’라는 기사로 살면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하지만 그가 없는 동안 비텐베르크는 급진적인 종교개혁으로 몸살을 앓았고 루터는 결국 시 지도자들의 요청으로 귀환했다. 귀환 직후 루터는 시교회에서 사순절 설교(1522년 3월 9~16일)를 통해 온건한 개혁 방향을 제시했다.

도시가 안정을 찾자 루터는 저술을 통해 종교개혁의 방향을 하나둘씩 제시했고, 인근 도시를 방문해 설교를 통해 종교개혁을 확산시켰다. 루터는 각 지방 시찰관을 통해 교회의 실태를 파악했는데, 이를 통해 1530년대 독일 중부인 작센과 튀링겐, 헤센을 중심으로 독일의 종교개혁을 든든히 세웠다.

   
▲ 헤르더교회-루터신학재단
온건한 개혁 공고히 한 ‘바이마르’
루터에 의한 개혁은 1522~23년 기사의 반란, 1523~24년 농민전쟁을 촉발했다. 하지만 루터는 참여를 거부하고, 군주들에게 강경 진압을 건의했다. 1522년 10월 그는 바이마르(Weimar) 시교회에서 ‘세상 권력에 어디까지 더 복종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는데 여기서 세상 권력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보고, 순종할 것을 요청한다. 급진개혁의 부정적 모습을 경험한 루터가 온건한 개혁을 다시 강조한 것이다.

시교회인 헤르더교회에서 먼저 살핀 것은 설교단이다. 루터 당시 설교단은 아니지만 단 위에 ‘Bleibet in mir'(너희는 네 안에 머물라)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루터가 그려진 강단 앞 제단그림은 독일 종교개혁과 루터의 신학을 상징하는 그림 중 하나이다. 중앙에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 오른쪽에는 부활의 기를 든 예수, 왼쪽에는 루터 등이 그려져 있다. ‘율법과 은혜'에 대한 내용이라고 한다.

헤르더교회를 뒤로 한 채 바이마르 성과 성교회, 안나 아멜리아 도서관을 향해 걸었다. 화려한 ‘로코코 홀’도 아름답지만 1534년 출간된 루터의 신구약성서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1534년 발행된 루터의 독일어 신구약성서는 중산층이 쉽게 구입할 수 있었고, 말씀에 기초한 종교개혁이 더욱 확산되도록 했다. 루터에 이어 괴테가 문학작품을 통해 독일어를 발전시켰고, 독일 최초 입헌공화국인 바이마르공화국이 탄생한 바이마르에 루터 성서가 있다는 점이 특별했다.

   
▲ 마그데부르크-요한니스교회
프로테스탄트의 아성 ‘마그데부르크’

마그데부르크(Magdeburg)는 종교개혁의 아성으로 불린다. 이 도시는 루터와 친숙하다. 청소년 때 대성당 근처에 있는 공동생활형제단 학교에서 1년간 공부했고, 수도사로서 도시의 아우구스티너 수도원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그는 종교개혁 초기 1524년 6월말과 7월초 두 차례 요하니스교회에서 설교했다. 종교개혁 입장에 선 시의회가 루터의 권위를 빌려 종교개혁을 확산시키기 위해 그를 부른 것이다.

루터는 ‘진실한 정의와 잘못된 정의’에 대하여 설교를 했는데, 루터의 설교를 들은 지도자들과 여섯 교회가 종교개혁을 수용했다고 한다. 루터는 수도원 및 교회 지도자들, 시의회 의원들을 만나 자신의 종교개혁적 생각을 쏟아냈고, 이런 노력이 선제후의 도시인 비텐베르크에 이어 대주교의 도시 마그데부르크가 종교개혁을 결단하게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마그데부르크에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루터의 설교현장인 요하니스교회이다. 시민으로 가득했을 교회 광장에는 루터의 기념상이 우뚝 서 있다. 동상 전면에는 ‘우리 안의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설교 가운을 입은 그는 왼손은 가슴에 얹고 오른손으로 성서를 들고 당당히 말씀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설교자의 선포는 시민들을 개혁과 정의의 길로 안내했다.

인근에 위치한 발로너교회는 과거에 아우구스티너 수도원이 있었던 곳이다. 수도원이 폐쇄된 이후 미래를 위한 교육 장소인 도시학교가 설립됐다. 지금도 교회에는 강의실과 식사와 모임을 위한 탁자 등이 있고 ‘복음적 학생단체, 개신교 고등학생을 위한 센터'로 사용되고 있다. 그날 이곳을 거닐었을 루터를 떠올렸다. 루터는 어떤 것이 참된 정의인지 고뇌했고 진실한 정의의 삶을 시민에게 당부할 것을 결심했을 듯하다. 그런 장소에서 현재의 청소년들이 독일의 미래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마그데부르크 대성당을 찾았다. 현재 개신교 건물인 대성당은 면죄부 판매와 관련된 알브레히트 대주교의 영역이었다. 겉으로는 잿빛을 드러내고 있지만 대성당 내부는 위엄을 대내외에 자랑한다. 이곳에서 테젤의 면죄부 금고를 만났다. 돈이라는 망령에 사로잡힌 우리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또한 기쁨과 환희, 상처와 슬픔을 간직한 마그데부르크의 역사는 종교개혁의 길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역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 요하니스교회-루터의 동상
종교개혁의 정치적 중심 ‘토르가우’

토르가우(Torgau)는 루터가 열여섯번 방문해 선제후 등과 종교개혁 방향을 논의한 곳이며 루터의 부인 카타리나 폰 보라가 죽음을 맞이한 장소이다. 루터의 부인이 마지막 생을 보낸 작은 박물관과 그녀의 무덤이 있는 시교회를 들러 ‘목회자의 집’ 앞에 섰다. 1530년 멜란히톤과 요나스, 부겐하겐 등이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근간이 되는 토르가우 신조를 만든 곳이다. 이 신앙고백의 전통을 잇는 청소년들이 ‘2017년 성서필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종교개혁의 정치적 중심인 작센 선제후의 궁전 ‘하르텐펠스 성'을 찾았다. 웅장한 사암으로 된 큰 계단 탑(벤델스타인)은 안쪽에 기둥이 없는 회전식 계단으로, 건축공법도 획기적이지만 무엇보다 화려함이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성에서 주목되는 건물은 1544년 10월 봉헌된 최초의 개신교 예배당이다. 작은 문을 지나면 3층으로 된 예배당이 드러나는데 예배당이 말씀선포, 공동체의 기도, 성례에 집중토록 해야 한다는 루터의 의지를 담았다고 한다.

예배당 중심, 회중석의 머리 높이에 위치한 설교단에는 예수가 12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서기관들과 토론하는 장면, 간음한 여인과 함께하는 모습, 환전상과 상인을 내쫓는 모습이 부조로 새겨져 있었다. 각각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의미한다. 성물을 담는 제단 대신 단순한 강단은 성찬을 회중과 함께 나누도록 한다. 이후 이 구조는 독일 개신교 예배당에 반영되었다고 한다.

토르가우를 나서기 전 성 오른쪽 탑에 올랐다. 성 뒤편을 흐르는 엘베강은 토르가우와 종교개혁의 도시 비텐베르크를 지나며, 카타리나의 수도원이 있던 님브센을 지나는 뮬데강을 만나 마그데부르크를 거쳐 북해로 흘러간다.

종교개혁 중심도시를 흐를 뿐 아니라 끝자락에 루터의 신앙을 수용한 덴마크 등 스칸디나비아 반도가 있어 엘베는 종교개혁을 품은 강이다. 강물처럼, 강 위의 바람처럼 종교개혁은 계속해서 흐르며 대하를 이뤘다. 엘베강의 바람은 이 길이 루터의 종교개혁이 세계로 전파된 경로라고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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