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라마나욧으로 나아가라(삼 19:18-24)

본문은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피하여 피할 곳을 찾아 도망하다 라마나욧으로 나아가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3번이나 단창을 던졌을 때 가까스로 피하였고,  다윗이 미갈의 집에 있을 때 사울은 군사를 급히 보내 다윗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이때 미갈의 도움으로 간신히 사울의 군사를 피해 창문을 통하여 도망을 쳐서 그길로 라마에 있는 사무엘을 찾아 갑니다.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거하였더라’(삼상 19:18)

라마나욧은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땅으로서 사무엘의 고향입니다.

라마나욧이란 높은 분이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에베소서 1장 20~21절에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지극히 높으신 영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바로 그분이 우리 인생의 라마나욧이십니다. 다윗이 라마나욧을 찾아간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사울을 피하여 사무엘이 있는 라마나욧을 찾아간 다윗의 모습에서 인생의 실존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안전한 곳을 찾아 이곳 저곳을 방황하는 존재였습니다. 다윗이 방황하듯이 우리 인생도 방랑자입니다. 나그네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1절에 우리를 가리켜 ‘흩어져있는 나그네’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7절에는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에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치느라 지치고 고단한 삶을 지냈습니다. 안전한 곳을 찾아 헤매는 다윗의 모습은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며 안전한 곳을 찾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찍이 야곱은 바로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세기 47장 9절에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삼십년 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되지 못하니 우리 조상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여기서 야곱은 자신의 인생이 나그네길이고 우리 조상도 나그네 길을 살았고 그 길은 험악한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인생길도 야곱의 길을 걷고 다윗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안식처로 느끼는 것이 물질입니다. 자신의 경험입니다. 또는 정보입니다. 지식입니다. 권세입니다. 그리고 인간관계를 통해 안전함을 느끼고자 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피난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인생의 문제 앞에는 이런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피난처를 바로 찾아갈 수 있다면 이것이 참된 복입니다.

마치 다윗이 라마나욧을 찾아간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들도 진정으로 곤고할 때 찾아가서 안식하며 새로운 힘을 얻고 소망을 얻는 곳이 있어야 합니다.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인간이 가져야 할 중요한 자아의식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소속감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은 어디에 속해있나, 어디서 살아가나. 나의 공동체는 어디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라마나욧되시는 예수님께 속해야 합니다,

또한 다윗은 사울을 두려워하며 지냈습니다. 사울을, 죽음을 두려워하였습니다. 하이데거는 두려움은 인간의 한계상황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상하게 불안과 두려움이 그림자처럼 우리에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365번이나 두려워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사랑하라는 말보다 두려워 말라는 말이 더 많이 언급됨을 볼 때 우리의 삶에 두려움은 뗄 수 없는 실존적인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존 맥스웰 목사는 두려움이라는 것은 '무기력을 낳고, 모든 일을 미루어서 행동하지 않게 하고,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게 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게 하며, 변명으로 그의 삶을 살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의욕, 자신감, 도전의식을 상실케 합니다. 사울을 두려워하는 다윗의 모습에서 죽음, 미래, 실패를 두려워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지난 9월 이곳 미국은 2001년도에 9·11 테러 사건이 일어난지 15년이 되어 여러 기념행사를 하였습니다.
9·11 사태이후에 미국사회뿐 아니라 전세계의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9·11 테러사건이 미국사회를 어떻게 바뀌었나’라는 특집을 매스콤이 다룬 것을 보았습니다. 그 변화중의 하나가 미국에 두려움이 만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으로 인해 미국의 사회 시스템이 여러 가지로 변하였습니다.

테러위협과 전쟁 공포 불안은 더욱 켜졌습니다. 그래서 안전시스템을 강화하는 과정에 경제 정치 국방 외교관계에 여러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위급함을 구하는 그 시스템이 진정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폴틸리히는 이시대는 안전함이 아닌 용기가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라마나욧으로 나아가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라마나욧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사울의 분부를 받은 살기등등한 군사들이 다윗을 잡으러 라마나욧으로 갑니다. 사울왕은 무장한 군사를 세 차례나 올려 보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곳에 간 군인들은 모두다 무장해제 한 채 선지자의 무리 속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합니다.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 할수 없는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20절에 하나님의 신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했다고 하였습니다. 사울의 신하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살기등등한 군사들이 다윗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접근하였으나 그들이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속에 선지자의 무리에 동화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을 잡으려고 칼과 창을 지니고 나아갔으나 칼과 창을 내려놓고 선지자 무리 가운데 있습니다. 다윗을 잡아와 죽이고자하는 살벌한 싸움의 현장 속에서 사울의 군사들은 성령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게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공유하는 은혜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진정 성령의 역사만이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이는 힘으로도 안되고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슥4:6~7)
라마나욧은 성령을 받는 곳입니다. 라마나욧되신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성령을 충만히 주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하시리라’(요14:26)

또한 18절에 다윗이 라마나욧에 가서 사무엘을 만나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고했다고 하였습니다. 라마나욧은 고하는 곳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모든 일을 인생의 라마나욧 되시는 예수님께 고하는 즉 기도와 간구를 통해 놀라운 은총을 받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5장 17절에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 즉 삼년 육개월 동안이나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 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우리 영혼의 호흡입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없다면 영혼이 죽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우리를 축복해주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다윗이 라마나욧을 찾아간 것처럼 우리도 인생의 진정한 라마나욧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안식과 평안을, 성령충만함으로 사랑을, 기도함으로 능력을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 나아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마태복음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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