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형은 목사
현재의 시국 혼란을 ‘최순실 게이트’라고들 이름하고 여기에 대통령이 연관돼 있다고 본다. 그러나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언론 보도와 여러 정황을 놓고 볼 때 이 사태를 ‘박근혜 게이트’라고 규정하는 것이 대세다(예컨대 11월 7일자 국민일보의 조용래 칼럼). 동의한다.

이 사태와 연관하여 지금 종이 신문에 쓰는 칼럼은 일간신문의 기사조차 ‘신(新) 문(聞)’이 아니라 구문(舊聞)이 되는 경우가 많다. 주간신문의 지면에 현재 시국에 대해 빠르게 진행 중인 사안을 다루는 것이 적절치 않은 이유다. 박근혜 게이트와 연관하여 좀 더 큰 틀에서 문제의 원인을 살피려 한다.

스포츠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페어플레이, 선수의 실력, 경기장의 운용, 관중의 매너, 경기의 상업적 흥행.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심판이다. 심판(審判)이란 한자어에서 판가름할 판에는 오른쪽에 칼 도(刀)가 있다. 칼은 자르고 가른다. 사실의 옳고 그름이나 나음과 못함 또는 가능성이나 유용성 등을 따져 가르는 것이 심판의 역할이다. 심판의 자질에서 일관성과 공정함이 핵심이다. 다른 각도에서 냉정함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심판의 권위가 생기는데, 그게 신뢰다.

예컨대 야구를 보자. 야구의 심판을 주로 표현하는 영어 단어가 ‘엄파이어(umpire)’다. 프랑스어에서 나온 이 말은 본디 제3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한다. 야구가 생겨날 때 처음에는 심판이 없었다. 경기가 발전하면서 심판이 생겼는데 초기의 심판은 모자와 연미복을 갖춰 입고 3루 근처의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주된 역할은 판정이 아니라 선수들 간의 토론을 중재하는 것이었다. 제3자의 입장에서 말이다. 이 뜻이 참 깊다. 심판이 경기장에 나가는 순간부터 그에게 친구는 없다. 어느 편도 아니다. 제3자의 입장에서 공정하게 경기를 이끌어가야 한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는 두 심판이 있다. 하나가 사회의 법적인 기능이고 다른 하나가 종교다. 종교란 말은 이 글에서는 그냥 기독교라고 하자. 언론이 참 중요한 사회적인 심판이지만 최종 판결을 법조계가 쥐고 있다는 점에서 법의 기능이 최종 심판이다. 검찰과 경찰, 변호사와 판사 등으로 구성되어 수사, 기소, 심리, 판결 등을 다루는 게 법의 사회적인 심판 기능이다. 법이 공정하지 않으면 사회의 신뢰도가 낮아진다.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에게는 법이 고무줄이고 돈 없고 힘없는 사람에게는 쇠 잣대면 사회의 공권력은 신뢰받지 못한다. 검찰, 경찰, 국정원, 감사원, 국세청 등은 법이 부여한 공권력을 갖고 수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이런 기관이 심판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사회의 기강과 신뢰가 무너진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렇다.

다른 심판인 기독교는 어떤가. 기독교를 한꺼번에 묶어서 얘기하기가 쉽지는 않다. 이른바 보수와 진보를 비롯하여 다른 여러 각도에서 기독교 안의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그러나 어떤 좌표에 서 있든지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을 최고 가치로 삼는다는 점에서는 같을 것이다. 성서의 말씀 외에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것이 기독교다.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모든 것에서 제3자로서 공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정부가 출범하면서 기독교의 진보적 리더들이 정부에 참여했다. 제3자의 자리를 버리고 어느 편이 된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보적 가치에 심각한 손실이었다. 보수 기독교의 경우는 거의 일관되게 보수 집권층의 편을 들었다. 최근의 보기로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교회연합이 박근혜 대통령의 개헌 구상을 지지한 것이다.

지난 10월 24일 오전에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에서 개헌 카드를 던졌다. 바로 같은 날 한기총과 한교연은 대통령의 용단을 적극 지지한다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신속하게 논평이 나오는가. 대통령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내부적인 논의와 토의도 없었는가. 또 같은 날 손석희의 뉴스룸에서 최순실 파일을 보도했다. 한국 교계의 두 보수 연합체는 한 언론인에도 미치지 못하는 심판이었다. 기독교는 깊이 회개하고 공의로운 심판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 499년 전 루터가 보름스에서 파문을 당하면서 “나는 여기 서 있습니다” 했는데, 그 자리는 하나님 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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