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움미술관에 상설전시되고 있는 조각 “거대한 여인III” (알베르토 자코메티, 1960, 청동, 235 x 29.5 x 54cm·사진)이다. 제목이 말하듯이 2미터가 넘는 장신의 여인이다. 키에 비해서 허리와 다리 그리고 팔은 너무 호리호리하다 못해 얇다. 이 조각 작품을 보면서 한국의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키는 어른답게 크지만 신체 부위는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 거대하지만 팔과 다리는 어린아이의 것 같다. 한국은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거대한 나라가 된 듯하다. 하지만 어딘지 불안해 보인다.   

어느 식품 겉봉지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건강을 생각한 4無: 무설탕, 무합성 감미료, 무합성 착색료, 무합성 보존료.” 과잉공급이 일어나다보니 해로운 것도 공급되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건강을 위해 많은 것을 섭취한다. 몸에 좋다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먹는다. 먹지 않아도 될 것도 먹는다. 심지어는 먹지 말아야 하는 것도 먹게 된다. 그러다보니 몸은 비대하고 거대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영양실조이다. 많이 먹지만 균형은 잡히지 않았다. 많이 먹어서 몸은 거대한데 건강하지 않다.

우리 사회는 너무 먹어서 비대해진 거인이 되었다. ‘몸에 좋다’는 말에 가리지 않고 먹다보니 해로운 것도 먹게 되었다. 결국 여러 번 배탈이 났다. 세월호 사고, 메르스 사태, 아동시신 훼손사건, 강남역 묻지마 사건,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타결,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 등이 그렇다. 배탈이 나면 몸을 돌봐야 한다. 그러나 돌보지 않고 계속 먹었다. 가리지 않고 마구 집어넣었다. 배가 아파도 먹었다. ‘아파야 청춘’이라고 하면서 계속 먹었다. 성장통이라고 하면서 계속 집어 넣었다. 많이 먹었지만 영양실조이다. 많이 먹고 거대해졌지만 골고루 영양이 전달되지 않았다. 배는 부르지만 한국을 지탱하는 중산층의 다리가 얇아져서 걸음이 불안하다.

중국 어린이가 놀아달라고 한다. 미국 친구가 놀아달라고 한다. 중국에서 당기고 미국에서 끌어간다. 한국이는 거인이 되어서 중국 어린이와 미국 친구와 놀아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다리가 풀리기 시작한다. 이상하다. 이것저것 많이 먹었기에, 배가 부르기에, 몸이 거대해졌기에 미국 친구와 중국 어린이와 당당하게 놀 수 있을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거대해졌지만 영양실조였다. 영양이 골고루 가지 않아서 머리는 커졌지만 발목과 팔목은 더욱 얇아졌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거대해지기 위해 과식하지는 않았는지 궁금하다.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지 먹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본다. 교회가 먹어야할 양식은 하나님 말씀 외에 다른 것이 있을까 생각해본다. 교회가 백화점만큼 거대해지려고 했다. 모든 것이 다 있는 곳이 되려고 했다. 커피숍도 있고, 독서실도 있고, 학원도 있고, 공연장도 있고, 미술관도 있고, 오락실도 있고, 모두 있는 곳이 되려고 했다. 그래서 거대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영양실조이다. 말씀이 있고 돌봄이 있어야 하는데 사업과 행사만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본다.

예수님이 성전을 청소하실 때까지 기다리는가?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시편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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