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교회와 치열한 논쟁, 개혁으로 이끌다

▲ 플라이센부르크
‘십자가 신학’을 발표한 하이델베르크
교황청의 첫 반응은 루터가 속한 아우구스티너 수도회를 통한 문제해결이다. 루터는 1518년 4월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수도회 총회에 참석,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다. 루터는 이 총회에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 ‘하이델베르크 논제’를 발표했다. 40여 개의 신학적, 철학적 논제를 통해 루터는 중세 교회의 신학을 ‘영광의 신학’으로 규정하고, 그것에 반대해 ‘십자가 신학’을 강조한다. 수도회원들은 루터를 지지했고 종교개혁의 횃불이 타오를 때 속속 종교개혁 대열에 동참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루터의 흔적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강의한 장소나 참석자 등의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루터가 성서학 교수란 점, 내용이 학문적인 내용이란 점에서 하이델베르크 대학 강의실이 유력하다.

또 당시 루터가 수도사였다는 점에서 아우구스티너 수도원에 체류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 시대 건물은 대부분 사라졌다. 아쉬움을 달래려는 듯 1983년 하이델베르크 대학 광장 한 쪽에 자그마한 기념 돌판이 놓였다. 바닥에 깔린 돌에는 “마르틴 루터, 1518년 4월 26일 그의 하이델베르크 논쟁과 아우구스티너 수도원 체류를 기념하며, 1983년 루터의 해에"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루터가 방문했을 가능성이 높은 대학교회 페터스교회와 시교회인 하일리히가이스트교회를 찾았다. 루터는 아마도 ‘하나님께 담대함을 달라’고 이곳에서 기도했을 것이다. 소박한 교회내부는 ‘영광’보다 ‘고난의 십자가’를 고백한 루터를 닮아 있었다.
 

▲ 루터와 카제탄 추기경 대화방
교황대사 추기경과의 만남, 아우구스부르크
아우구스부르크는 루터가 1518년 교황 대사인 카제탄 추기경을 만나 면죄부 판매와 교황권을 놓고 담화를 나눈 곳이다. 10월 7일 도착한 루터는 카르멜 수도원, 성 안나교회에 머물렀고 푸거하우스에서 추기경을 만났으며, 그를 체포하려는 움직임을 느끼고 20일 밤 성벽을 넘어 도시를 떠났다.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성 안나교회이다. 안나교회는 종교개혁 초기인 1523년부터 요한네스 프로쉬에 의해 종교개혁적 설교가 진행됐는데 루터가 수도원 관계자들과 대화한 것에서 이런 정신이 파생됐을 것이다. 설교단 위의 나팔 부는 천사상은 개신교인의 종교 자유를 인정한 웨스트팔리아 조약을 상징하는 것이라 하는데, 나팔은 종교개혁이 쉼 없이 선포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 같다.

예배당을 나서 ‘루터의 계단 박물관’에 들어섰다. 루터가 머물렀던 이곳은 박물관이 됐다. 계단 벽에는 1415년 얀 후스의 죽음에서 루터의 95개 반박문 게재로 이어지는 종교개혁의 전 역사가 정리되어 있다. 죽음을 각오했던 루터가 쓴 편지글 “…내가 바르게 말한 것을 취소하는 것보다 죽음을 더 원한다”가 감동을 준다.

옛 수도원의 한 방에는 면죄부 금고가 있고 그곳에선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죄인이다.’ 유혹의 목소리는 돈을 부르고 있었다. 중세처럼 오늘 우리 교회도 값싼 복음, 면죄부를 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카제탄과 루터의 만남을 형상화한 방에서 두 사람과 95개조 반박문을 만났다.

그리고 ‘Widerruf’(취소하라)는 강한 명령과 ‘Niemals’(할 수 없다)는 조용한 답변이 대비되어 귀에 들린다. 루터의 진심이 목소리에 실려 전달된다. 박물관을 나서면서 담화 이후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슈말칼텐 전쟁과 종교 협약(1555), 30년 전쟁과 웨스트팔리아 조약(1648)으로 이어지는 독일 종교개혁 역사를 개괄적으로 볼 수 있었다.

루터의 계단박물관
루터가 머문 성 안나교회를 나서 카제탄 추기경을 만났던 푸거하우스(Fuggerha¨user)를 찾았다. 건물 앞에는 “루터는 1518년 10월에 교황의 추기경 카제탄을 상대하여 그의 테제의 취소를 거부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세 번의 만남에서 입장차만 확인한 추기경은 루터를 압송하려고 시도한다. 종교개혁의 뜻을 펼치기 전에 죽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루터는 성벽을 넘어 탈출했다.

루터가 탈출했던 성벽을 찾았다. 두건을 눌러 쓴 루터 모습과 함께 “Da Hinab. 1518”(여기에서 내려감)이란 글귀가 적혀있다. 성벽의 붉은 벽돌을 손으로 만지며 도망자 루터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또 하나님께서 중세교회가 루터의 말을 경청해 갱신과 개혁으로 나아갔다면 어떤 결과가 만들어졌을지 생각해 봤다. 대답 없는 울림이 입술과 귓가에 맴돈다.

중세교회와의 치열한 논쟁의 장 라이프치히
루터는 1519년 6월 말 인골슈타트 대학(지금의 뮌헨대학교)의 교수인 요한 에크와 논쟁을 벌인다. 바로 유명한 라이프치히 논쟁이다. 신학 논쟁인 만큼 토마스교회에서의 개회 미사를 시작으로, 플라이센부르크에서 토론이 진행됐다.

루터는 신학천재로 이름을 날렸던 에크의 달변과 비상한 기억력에 맞서 힘들어했다고 한다. 20여 일 가까이 이어진 토론에서 후스의 사상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냐고 공격하는 에크에게 후스에게도 복음적 논제들이 있다는 말로 루터는 공의회의 오류 가능성을 지적한다. 토론의 승리자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루터가 이단 옹호자로 말할 수 있는 꼬투리를 준 점에선 에크가, 루터가 종교개혁의 대표 인물로 부각된 점은 루터가 승리했다고 볼 수 있다.

▲ 라이프찌히 토마스교회
개회예배가 열린 토마스교회를 들른 후 논쟁의 장소, 플라이센부르크를 찾았다. 파괴된 후 거대한 건물이 들어선 곳엔 시청사가 자리했다. 출입문 계단에 앉아 이곳 어딘가에서 진행됐을 두 사람의 논쟁을 떠올린다. 처음엔 존중하는 인사와 학문적 칭찬으로 탐색했을 것이다. 그러나 논쟁은 격렬해져 발언 하나 하나에 꼬투리를 잡아 공격과 방어가 펼쳐졌을 것이다. 마지막에는 상대방의 견해에 대해 이단적이며, 성서적이지 않다고 선언했다. 격전의 현장에서 루터의 열정, 개혁의 열정을 느껴본다.

라이프치히 논쟁 후 새 황제가 선임됐고 교황청은 루터 재판을 시작했다. 그 결과 1520년 6월 루터의 파문을 위협하는 교황칙서가 발표된다. 루터 또한 ‘선행론’(5월)을 시작으로 ‘독일 크리스천 귀족들에게 고함’(8월), ‘교회의 바벨론 포로’(10월), ‘크리스천의 자유에 대하여'(11월) 등 종교개혁 저서를 연달아 발표했다.

결국 루터는 12월 10일 “산돼지가 주님의 포도원을 짓밟았다”고 선언한 교황 교서를 불태워 항의했고, 교황은 1521년 1월 루터를 파문, 종교개혁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번지도록 이끈다. 종교개혁은 이제 중세 교회의 틀을 벗어 ‘개신교 공동체’라는 새 그룹의 형성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