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중심으로 바라보자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이 이방 땅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는 시기가 아모리 족속의 죄악과 관련된 까닭은 무엇일까? (창 15:16)

창세기 15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제안한 다메섹의 엘리에셀이 아닌 그의 몸에서 난 자가 상속자가 될 것과 함께 가나안 땅이 그와 그의 후손의 소유가 될 것임을 확인해 주셨다. 이에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이 자신의 소유가 된다는 약속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고 반문하였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삼 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사백 년 동안 이방의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게 될 것을 예고하셨다. 그들이 그렇게 이방에서 긴 세월 동안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은 그때까지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가득 차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창 15:16) 여기에서 ‘가득 차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샬렘’은 ‘빈 틈 없이 꽉 차다’로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그들의 죄악을 묵인할 수 없으심을 뜻한다. 

이스라엘이 요셉의 초청으로 애굽에 내려가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늘의 별처럼 크게 번성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런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을 통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온 것은 사백 여년이 지난 뒤였다. 이스라엘이 출애굽까지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이방의 객이 되어 그들을 섬겼던 이유는 당시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있었던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구원과 가나안 땅으로의 입국이 아모리 족속의 죄악과 연관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의 소유가 되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편파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기 위하여 아모리 족속을 억지로 몰아내지는 않으신다. 아모리 족속이 그 땅에서 쫓겨난 것은 그들의 죄악이 가득 찼기 때문이었다. 그런 시점에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가나안 땅 입국이 이루어진 것이다.

성경에서 땅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소중한 선물이다. 그 땅에서 평안한 안식과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그런 축복의 삶을 유지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따르는 거룩한 삶이 필요하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그곳 주민들은 땅으로부터 토해냄 곧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게 된다. 그런 하나님의 기준은 아모리 족속만이 아니라 그 땅을 선물로 받은 이스라엘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레위기 18장 28절이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가 있기 전 주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라고 이스라엘을 경고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점령당하면서 포로로 끌려 간 것은 그런 경고가 역사적으로 구체화된 경우였다. 거룩함이 축복된 삶을 지탱시켜주는 뿌리인 셈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부여하신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가는 모세를 죽이려하셨는가?(출 4:23~26)

하나님께서는 미디안 광야에서 양떼를 돌보는 모세를 부르시어 출애굽 구원의 중재자를 삼으셨다. 모세는 다섯 번이나 변명을 하면서 자신의 소명을 거절하였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대안을 제시하셨고, 모세는 마침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돌아가는 도중 숙소에 머물고 있던 모세를 만나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이려하셨다. 그때 그의 아내의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잘라 그의 발에 대는 재치 있는 행동으로 모세는 죽음을 모면하였다. 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중재자의 소명을 받아 애굽으로 돌아가는 모세를 죽이려하셨는가?

성경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히브리적 사고는 분석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헬라적 사고와는 달리 통합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이다. 그와 같은 히브리적 사고방식은 모든 것의 기원과 결과가 하나님에게 있음을 강조한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는 히브리적 사고의 대표적인 요약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하시다’라는 표현은 곧 모세가 죽을 것 같이 위중한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생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생명을 거두어 가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성경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불행한 상태를 ‘하나님께서 태를 닫으셨다’라고 표현한 것도 같은 예에 해당된다.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생명을 잉태하지 못하는 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막았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모세에게 그런 어려운 상황이 생긴 것은 출애굽 마지막 단계에서 하나님의 장자 이스라엘을 내어 보내주지 않으려는 바로의 장자를 하나님께서 죽이시겠다는 선언과 관련이 있다.(출 4:23) 출애굽과 같은 막중한 일을 맡은 모세는 그때까지 자기 아들에게 할례를 시행하지 않았다.

모세가 당한 위기의 원인이 거기에 있음을 간파한 그의 아내 십보라는 재빠르게 아들에게 할례를 시행하였고, 그로 인하여 모세는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런 사건은 더 큰일을 맡은 사명자일수록 더욱 높은 도덕성과 더욱 깊은 영성이 필요함을 가르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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