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선악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 눈에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만, 눈이 보이지 않는 선물은 더 많습니다.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선물입니다만,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은 더 큰 선물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각 계절이 보여주는 자연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더욱 더 감사한 것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 모든 것들이 선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일정한 경계선 안에 있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이 경계선을 무시하고 넘어가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여도 죄가 됩니다.

창세기 3장 6절에 보면 하와가 뱀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보았을 때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와가 나무를 보았을 때 ‘보암직’ 하다고 한 것과 ‘탐스럽다’고 생각한 것까지는 괜찮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이는 틀린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와가 선악과를 보며 ‘보암직’(히.타아바)하다는 말과 ‘탐스럽다’(히.네헤마드)란 말은 단순히 선악과가 좋아보인다는 차원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와가 그 나무실과를 보며 마땅히 품었어야 할 마음을 넘어서 그 이상의 욕망을 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 증거로 신명기 5장 21절에서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타흐마다) 말지니라 …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히.티트아바) 말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5장 말씀에서 네 아내를 ‘탐내다’(타흐마다)는 말은 하와가 선악과 나무를 바라보며 탐스럽다(히.네헤마드)고 할 때의 어근(語根)과 동일합니다.

이와 동일하게도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다’(히.티트아바)는 말과 하와가 선악과를 보았을 때 ‘보암직’하다는 말도 어근이 동일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와가 선악과를 보며 품었던 마음은 ‘강한 욕망’이요 ‘탐욕’으로서 이는 하나님이 금(禁)하신 마음입니다.

따라서 이미 생각해야 할 분량을 넘어서서 품는 마음 즉 욕심은 ‘죄’가 됩니다. 로마서 12장 3절에서 바울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무엇을 보느냐 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마땅히 품었어야 할 마음을 넘어서서 품는 욕망과 탐욕은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의 행위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아무런 제약없이 내 멋대로 하나님이 정하신 테두리를 넘어갔습니다. 이는 우리 모든 사람이 사망하고 실패하고 몰락한 이유입니다. 그 죄는 저를 무너뜨렸을 뿐 아니라, 우리 후손들을 무너뜨리게 될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예수님이 이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유는 우리를 부자되게 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를 출세시키시기 위함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음으로 그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진홍같이 붉은 죄를 지었을지라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에 죄 사함의 능력이 있습니다. 바로 그 십자가에 죄 사함의 권세가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심판을 믿습니다. 또한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도 믿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욕심으로 누릴 수 있는 것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것들입니다. 이는 무슨 일을 할 때마다 그것이 마땅히 내가 품어야 할 한계를 지키고 있는가를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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