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정기 세미나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박명수 교수)는 지난 9월 27일 우석기념관에서 제83회 정기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이연승 교수(서울신대)는 일제 강점기 시대 윤치호와 YMCA 활동에 대해 발제했다.

이연승 교수에 따르면 윤치호는 19세기 말 유교 정체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근대 의식을 받아들이면서 기독교를 수용하게 되었다. 이 교수는 윤치호를 ‘오륜 중심의 윤리도덕, 대중적 실용주의를 표방한 실학사상, 기독교 세계주의를 갖춘 인물’로 설명했다.

그는 “윤치호는 실학파의 전통을 존중했기에 기독교의 세계주의에 보다 개방된 태도를 취할 수 있었다”며 “구한말과 격동의 개화기를 살아온 윤치호가 기독교의 평등과 박애를 쉽게 받아들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말했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윤치호는 1885~1888년 중국 상해의 중서서원에서 기독교와 역사, 세계문학, 화학, 의학 등을 배웠으며 당시의 경험은 그의 진로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87년 부활절에 세례를 받은 윤치호는 상해의 각종 종교, 사회 모임에 참여하면서 감옥전도를 시행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윤치호는 미국을 거쳐 1903년 한국에 도입된 YMCA 활동에 적극 가담한 후 한국의 교육 사업과 청년 사역에 깊숙이 관여했다.

이 교수는 또 윤치호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YMCA로 쏟았을 뿐 아니라 서구 선교사와 동등한 초대 서기로서 임무를 수행했고 이사회 회장으로 미국 선교사들의 자문 역할을 감당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제 말기 윤치호는 독립운동가에서 친일 인사로 변절하게 된다. 이렇게 된 것에는 당시 한국 사회의 변화와 한국 기독교의 변질 등이 크게 작용했다. 일본의 요구로 한국 YMCA가 일본 YMCA로 병합되었고 한국의 기독교도 일본의 신도와 합병되었으며 이는 YMCA가 추구했던 민족해방 운동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 YMCA 대표자들은 신사참배에 동참했으며 민족운동의 진원지 배제학당에도 일본천황을 숭배하는 신사가 세워진 것이다.

또 전국적으로 영어를 반대하는 시위와 함께 서구 선교사들과 전도자들은 일본의 원수라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됐다. 게다가 일본의 기독교인들도 일본의 황제와 제국이 유럽보다 훨씬 더 우수하며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를 통해 황제에게 경배해야 한다고 전하기 시작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일본의 논리에 설득되었다.

특히 일본은 1935년부터 샤마니즘과 신도, 기독교와 신화를 동렬에 올려놓고 마침내는 신도가 한국 최대 최고의 종교라고 선언하면서 왕족에게 예배드릴 것을 강요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쫓겨난 것도 원인 중 하나였다. 1935~1940년까지 한국 땅을 떠난 선교사의 수는 250명이었다. 윤치호는 선교사들이 한국을 떠날 때마다 마음이 찢기는 아픔을 느꼈다고 한다.

결국 노구였던 윤치호는 생애 50년 간 새해 첫 날 하나님께 드렸던 찬양을 중단하고 1939년 새해부터 총독부 사령관에게 경배했다. 1940년부터는 추수감사절 예배를 신사참배로 대신했다. 그해 자신의 한국이름을 일본이름으로 개명하기도 했다. 당대 첫손에 꼽히는 기독교 지도자가 하루아침에 친일파로 변절한 것이다.

그는 결국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조선지원병 후원회, 조선임전보국단 등 대표적인 친일단체의 핵심인물로 참여했다.

이 교수는 “일본의 강요에 의해 주입된 배타적 민족주의가 결국 윤치호의 변화를 가져왔다”며 “윤치호와 한국YMCA가 함께 겪었던 역사적 아픔과 사실에 대한 바른 평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그는 “일제시대를 거쳐 근대화의 급격한 변화를 거쳤던 한국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객관적 검증과 평가가 요구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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