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탑의 체험’과 ‘95개조 반박문’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걸렸던 비텐베르크성교회

수도사 루터는 1511년 에르푸르트를 떠나 비텐베르크에 정착했다. 몇 해 전(1508년)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윤리철학을 강의한 루터는 로마를 다녀온 후 비텐베르크의 수도원 부원장과 대학의 교수로, 그리고 시교회의 설교자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
옛 기차역에 내려 제일 먼저 비텐베르크 시청 앞 광장으로 갔다. 광장 한 쪽 종교개혁 500주년을 알리는 붉은 색 지구본 위로 500주년 마크와 글씨, 루터의 얼굴이 선명했다. 광장에는 루터와 동료 멜란히톤의 기념상이 좌우에 자리했다. 1821년 건립된 루터 기념상은 설교자 가운을 입은 중년의 루터를 형상화했는데 성서를 펼쳐든 모습에 눈길이 간다. 말씀에 사로잡혔고 성서를 깨달아 가르치는데 최선을 다한 그를 정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옛 기차역에 내려 제일 먼저 비텐베르크 시청 앞 광장으로 갔다. 광장 한 쪽 종교개혁 500주년을 알리는 붉은 색 지구본 위로 500주년 마크와 글씨, 루터의 얼굴이 선명했다. 광장에는 루터와 동료 멜란히톤의 기념상이 좌우에 자리했다. 1821년 건립된 루터 기념상은 설교자 가운을 입은 중년의 루터를 형상화했는데 성서를 펼쳐든 모습에 눈길이 간다. 말씀에 사로잡혔고 성서를 깨달아 가르치는데 최선을 다한 그를 정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광장을 나서 루터가 교수로 사역했던 비텐베르크대학을 찾았다. 비텐베르크대학은 1502년 작센의 선제후에 의해 설립된 대학으로, 루터는 이듬해 10월 신학박사학위를 받은 후 성서학 교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인근에 위치한 에르푸르트대학(1392), 라이프치히대학(1409) 등 100년이 넘는 대학에 비해서는 무명 대학일 뿐이었다.

그러나 루터 한 사람으로 인해 좋은 교수와 학생이 몰려들고 종교개혁 때는 유럽 중북부의 최고 대학으로, 종교개혁가 양성의 요람으로 명성을 알렸다. 이런 자부심은 대학 건물에 새겨진 교수와 졸업생의 명판과 광장 바닥의 주요 대학 설립년도 표지석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또 1503년부터 역사의 현장을 지킨 옛 대학 문은 대학의 산증인임을 대내외에 보여준다. 하지만 비텐베르크대학은 1817년 할레대학과 합쳐졌고, 대학 건물은 군부대 숙소나 살림집으로 상당기간 사용되는 등 지금은 역사 속 명성을 찾을 수 없었다.

루터하우스와 탑의 체험
대학을 나서 루터가 살았고 종교개혁 이상을 가슴에 품은 옛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현재 루터하우스)을 찾았다. 건물 외벽에는 루터의 옆얼굴과 ‘1508~1546년까지 살았고 활동했다'는 기념비가 부착되어 있었다. 루터는 이곳을 거점으로 비텐베르크 수도원의 부원장 겸 설교자로, 인근 11개 수도원을 관할하는 책임자로 활동했다. 비텐베르크를 넘어 작센지방,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를 넘어 중세 독일 교회 속에서 차분히 자신의 기반을 확대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루터가 교수로 활약한 비텐베르크대학
하지만 외면적 상황과 달리 루터의 내면은 불안에 갇혀 있었다. ‘폭풍우 속의 벼락체험' 이후 죽음 앞에 선 자신, 최후 심판대에 선 죄인인 자신의 모습에서 오는 번민과 불안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루터는 ‘아무리 완벽한 수도적 삶을 살더라도 내면에서 솟는 죄악된 생각과 감정을 다스릴 수는 없다'는 인간의 근본적 한계 앞에서 절망했던 것이다.

루터는 성서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수도원의 서재에서 성서 연구와 주석에 매달렸고, 1513년부터 1519년까지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 강해를 통해 고민을 학생들과 나눴다. 그 과정에서 어느 날 루터는 자신의 고민을 해결하는 말씀 앞에 선다.

“마침내 주님은 내게 은총을 베푸셨다. 나는 밤낮으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의 함축된 의미를 묵상했다. … 나는 내 자신이 새롭게 태어남을 느꼈고 천국의 넓은 문으로 들어간 듯 했다. 그 이후로 모든 성경이 내 눈에 다르게 보였다."(‘라틴어 저술' 서문). 로마서 1장 17절 말씀에서 얻은 이 깨달음이 바로 ‘탑의 체험(Turmerlebnis)'이라 부르는 사건이다.

하지만 현재 루터하우스 건물의 탑은 계단일 뿐이며 옛 탑은 없다. 오래전 탑과 루터의 서재는 1층 매표소 뒤편 돌무더기 흔적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그 곳에서 ‘유레카(Eureka, 나는 찾아냈다), 하나님이 보여주셨다'라고 감격했을 30세의 루터를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3층으로 된 루터하우스에는 작센의 궁정화가인 크라나흐가 그린 루터의 시대별 초상화, 16세기의 면죄금고, 루터가 면죄부를 비판한 시교회의 설교단, 95개조 반박문, 교황의 파문칙서, 그가 번역한 성서와 마지막 수도복 등이 전시되어 있다.

루터가 종교개혁자들과 대화를 꽃피운 그의 방 탁자 앞에 섰다. 아마도 루터는 강력한 눈빛을 한 채로 로마교회의 잘못과 바른 방향을 말했을 것이다. 또 이를 위해 교수와 학생들, 제후들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그의 주장은 오늘 중세교회를 닮아버린 한국교회에도 유효한 가르침일 것이다.

시 교회에서 만난‘고난의 십자가’ 신학
광장 한 쪽 편에 있는 시교회를 향했다. ‘종교개혁의 어머니교회'로 불리는 세인트마리엔교회는 1525년 첫 독일어 예배가 드려졌고, 1535년 첫 개신교 목사 안수식이 거행된 곳이다. 이곳에서 루터는 1517년 초 면죄부를 비판했고, 나중에 수많은 종교개혁 정신을 담은 설교를 쏟아냈다.

그의 목소리를 품고 있는 교회당은 매우 소박했다. 강단 왼편 피를 뿜는 예수 그림과 함께 강단 위 제단 그림은 크라나흐가 그렸는데 그곳에서 루터를 만날 수 있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왼편에는 설교단의 루터가, 오른편에는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었다. 오직 십자가만을 전하고 있는 루터를 상징하는 그림이다.

당시 중세교회의 ‘영광의 십자가'를 비판했던 루터, 그는 ‘고난의 십자가'를 요구했다. 오늘 ‘영광'을 찾고 누리는 모든 교회에 누군가는 ‘고난의 십자가’를 외치고 행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간다.

1517년, 성교회 문에 걸린 95개조 반박문
루터의 깨달음은 로마교회 갱신 요구로 이어지는데 그 계기가 된 사건이 독일 중부 지역에서 확산된 면죄부 판매이다. 중세 십자군 전쟁 때부터 있었던 면죄부는 루터 때에 와서 발행 목적도, 판매 방식도 매우 유치해져 더 큰 문제가 됐다. 1515년 알브레히트 주교는 마인츠 대주교가 되기 위해 푸거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렸고, 이를 갚기 위해 베드로 대성당 건축비용을 마련하려는 로마와 협의해 50%를 로마에 주는 조건으로 면죄부 판매권을 얻는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루터하우스에 전시된 면죄부
판매책임은 도미니크회 수도사인 테젤이 맡는데 그는 곡예사를 앞세워 사람들을 모으고 모든 죄에 대한 완전한 면책과 연옥에 있는 영혼의 구원을 약속한다. “동전이 궤 속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영혼이 연옥에서 벗어나 천국에 오를 것이다"라는 설교는 부모와 친구를 사랑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강탈해갔다. 결국 테젤이 비텐베르크 인근에 나타나자 루터가 나서 면죄부를 반박하는 95개조 논제를 작성해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교회 정문에 붙였다.

당시 루터는 세 부의 라틴어 반박문을 만들고, 두 부는 알브레히트 대주교와 브란덴부르크 감독 제롬 스쿨테투스에게 보냈다고 한다. 라틴어로 작성하고, 핵심 주교에게 보낸 것은 면죄부의 부당성을 설득하고 학문적 토론을 하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루터의 면죄부 반박문은 인쇄되어 삽시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학문적 토론과 논쟁을 넘어 종교개혁의 거대한 불길로 활활 타오른다.

루터가 반박문을 붙인 성교회 정문에 섰다. 성교회는 몇 년째 수리 중이었고 루터의 무덤과 설교단이 있는 내부는 8월까지 출입할 수 없었다. 원래 나무문이었던 정문은 화재로 불탔고, 오래전 95개조를 새긴 청동문으로 바뀌었다. 문 앞에서 왼손에 반박문을 잡고 오른손에 망치를 든 수도사 루터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날, 그의 망치소리는 매우 작아 옆 사람 이외에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 울림은 독일을 넘어 유럽, 전세계 종교와 사회를 바꾸는 나팔 소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95개조에는 “면죄부 설교자들에게 돈을 빼앗긴 많은 사람들에게 교황은 필요하다면 성 베드로 성당을 팔아서라도 갚아주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한다"는 말과 “평안, 평안하고 부르짖는 예언자는 다 물러가라. 십자가, 십자가를 부르짖는 모든 예언자들은 축복 받을지어다"라는 말이 담겨있다. 비록 면죄부와 회개, 교황권위의 한계 등을 제한적으로 말했지만 로마교회 개혁의 큰 밑그림이 담겨있다. 그래서 루터의 논제는 오늘의 우리교회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다. 깊이 있는 성찰이 또한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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