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화초를 가꾸는 권사님이 “못생긴 나무도 있어야 잘생긴 나무가 돋보이고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멋이 있다.”는 말을 하였다. 당신은 무심코 하신 말일지 몰라도 전체를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동일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하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힘들어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사람은 각각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회적 존재라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각각 외형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사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 그런데 각자 다름을 주장하고 다름 그대로만 존재한다면 무질서 한 사회가 되어 한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는 다름을 인정하되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조합할 제도가 만들어져 있다. 따라서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려면 우리는 함께 존재해가는 사회적 문화를 이해하고 상황을 이해하고 나의 생각이 언제든지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

어느 날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채나라로 가던 도중 양식이 떨어져 채소만 먹으며 일주일을 걷다가 어느 마을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공자가 깜박 잠이든 사이에 안회가 쌀을 구해와 밥을 지었다. 공자가 잠에서 깨어 밖을 내다보니 안회가 밥솥의 뚜껑을 열고 밥을 한 움큼 집어먹고 있었다. 평상시에 공자가 먼저 먹지 않은 음식에는 수저도 대지 않는 안회가 몰래 밥을 먹는 그를 보고 놀랐다.

공자는 “안회야, 내가 방금 꿈속에서 선친을 뵈었는데 밥이 되거든 먼저 조상에게 제사 지내라고 하더구나”라고 말했다. 먼저 밥을 몰래 먹은 안회를 뉘우치게 하려는 의도이었다. 안회는 “스승님, 이 밥으로 제사를 지낼 수는 없습니다. 제가 뚜껑을 연 순간 천장에서 흙덩이가 떨어졌습니다. 스승님께 드리자니 더럽고, 버리자니 아까워 제가 그 부분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공자는 부끄러워하며 안회를 잠시나마 의심한 것을 후회했다.

공자는 다른 제자들에게 “예전에 나는 나의 눈을 믿었다. 그러나 나의 눈도 완전히 믿을 것이 못 되누나. 예전에 나는 나의 머리를 믿었다. 그러나 나의 머리도 역시 완전히 믿을 것이 못 되누나” 라고 말하여 자신의 한계와 연약성을 고백하였다고 한다.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펜실베이니아로 가는 중앙 보도에 층계가 있다고 한다. 이 층계는 실력과 성실성이 널리 알려진 ‘옴스테드’라는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층계에서 넘어지는 사람이 유난히 많았다고 한다. 한번은 그 층계에서 넘어져 부상한 한 시민이 그를 찾아가 강력히 항의했다. 그러자 옴스테드가 말했다. “나는 그 층계를 건축하기 위하여 내 집에 나무층계를 만들어놓고 오르내리며 오랫동안 실험한 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하자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좀 조심해서 걸으시기 바랍니다. 제 책임은 아닌듯합니다.”

옴스테드의 말에 부상한 사람은 화가 치밀었으나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 시민이 옴스테드를 살펴보니 그는 장애인이었다. “아니 옴스테드 씨, 당신의 한쪽 다리가 많이 짧군요.”

사람들은 자기를 기준으로 하여 남을 판단한다. 내가 본 것은 확실하며, 내가 말하는 것은 거짓이 없고, 내가 행하는 것은 정의로운 것이며, 나의 판단은 솔로몬의 것과 다름이 없다는 듯이 큰 소리 친다. 그러나 남을 판단하는 기준은 내게 있지 아니하고 나의 정당성은 큰 소리에 있지 않다. 우리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하고 그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나를 노래하지만 우리의 일상의 기준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하겠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고전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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