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을 덮자

이성훈 목사
큰 바다를 오가는 어떤 배가 있었습니다. 선장은 술을 좋아해서 거의 매일 술에 취해 살았습니다. 반대로 항해사는 거의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입니다. 선장은 항해사를 미워했고, 둘은 불편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항해를 하던 중 평소에는 술을 마시지 않던 항해사가 어쩌다가 술을 마시고는 취하게 되었습니다. 항해사를 미워하던 선장은 그 날 ‘항해일지'에 “오늘 항해사가 술에 취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항해사가 술에 취한 것이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항해사가 해고되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선장의 계략을 안 항해사가 “제발 그 기록만은 지워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그러나 선장은 “당신이 술 취한 것은 사실 아닙니까? 나는 사실대로 기록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 끝내 기록을 지워주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 이번에는 항해사가 ‘항해일지’를 기록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항해사는 항해일지에 “오늘은 선장이 술에 취하지 않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사실 그날 선장은 술을 마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타인의 허물을 감싸안고 덮어 주는 일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감싸주고 덮어 주기 보다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캐고 들추어 내고자 하는 속성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오죽하셨으면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라고 하셨겠습니까!

사람은 누구에게나 할 것 없이 허물이 있기 마련입니다. 심지어는 당대의 의인이라고 여겨졌던 노아조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포도농사를 짓고 살았던 노아가 포도로 빚은 술을 마시고 벌거벗고 누웠을 때 함이 아비의 하체(히.에르바)를 보았습니다.

히브리어의 에르바는 성기를 의미하는 원색적인 표현입니다. 즉 성경에서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그가 어떤 실수를 하였는지 여실히 보여준 것입니다. 물론 노아의 입장에서 볼 때 술에 취해서 벌거벗었던 사건은 어떤 의도된 실수라기 보다는 우발적인 실수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 때 함은 아비의 하체(히.에르바)를 보고 밖으로 나가 두 형제에게 알렸습니다. 이는 아비를 욕되게 하는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함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노아가 술에 취한 정황을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의인이라고 해봤자 별것 아니구나”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를 비방하고 정죄하는데 열을 올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함의 태도와는 달리 셈과 야벳은 전혀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비의 옷을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아비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의 벌거벗은 몸을 덮고, 얼굴을 돌이켜 그 아비의 하체(히.에르바)를 보지 아니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태도 속에서 숨겨져 있는 내 모습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함의 태도를 비방하기도 하고 설교에 자주 등장을 시킵니다만, 그의 모습 속에서 다른 형제의 벌거벗은 수치를 형제에게 알려주고 싶어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 안에서 함과 야벳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목적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신앙이란 결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종교 생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종교행위 자체가 신앙의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반드시 창조주 되신 예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만남을 가진 이들이야 말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사람들의 죄와 허물을 들추어 내지 않고 말없이 덮어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감싸안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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