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성결교단의 어른목회자셨다”

이정근 목사
고 안수훈 목사님은 한국 고난사와 생애를 함께 하신 분이셨다. 일제 강점기에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나 7살에 영풍소학교에 입학해서 일본식 교육을 받았다. 그는 조선말을 엄격히 금지하고 일본말만 써야 했던 교육을 받으면서 민족의식이 배양되어 갔다. 

그럴 때에 친구의 소개로 마을에 있는 긴골장로교회 주일학교에 출석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믿는 것만이 우리 민족이 살 길이라는 확신이 소년의 가슴을 채웠다. “하나님, 우리 민족도 이스라엘처럼 구원해 주십시오. 그것을 위하여 저도 목사가 되겠나이다.” 그런 결단의 기도를 하게 되었다.

그 기도대로 주님은 안수훈 소년의 길을 인도해 주셨다. 하나님은 능력의 손으로 보이지 않게 안수훈 청년을 보호하셨다. 일제 강제징집도 용하게 피할 수 있었고 황해도가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의 지배 아래 들어가 목숨을 걸고 남한으로 탈출할 때도 위기 위기마다 도와 주셨다.

해방이 되면서 바로 평양 성화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의 준비를 하던 중에 공산정권을 반대하는 신의주학생사건이 터졌고 모교인 성화신학교도 강제폐교 되었다. 그래서 부모형제를 두고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탈출했다.

서울에 와서는 즉각  서울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했다. 하나님은 안수훈 청년을 장로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의 신학교육을 받게 하심으로 후일 교회연합운동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기초를 준비시키셨다.

안 목사님은 졸업하자마자 터진 한국동란 기간 동안 군인들을 신앙으로 무장시키는 군목 사역에 헌신했다. 그리고 휴전이 되면서 민간교회 담임목사를 거쳐 서울 하와이교회로 전임했다.

이후 1966년 미국으로 이민 와서 4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1970년 11월 첫 주일 자신의 사택에서 나성성결교회의 창립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 교회는 미주성결교회 최초의 교회 곧 어머니교회였다.

성결교회는 당시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와 달리 미국에 교단이 없어서 성결교회를 개척하는 일에는 외부의 지원이 전혀 없었고 특히 교회당 시설을 임대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또 성결교회 목회자들에게는 독립교회나 미국교단에 가입할 기회가 열려 있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북한 공산정권, 한국전쟁 등 험악한 시대를 살아오면서도 그런 환경여건에 굴복하지 않고 뚝심목회를 해 내셨던 분이기에 아예 창설 때부터 ‘성결교회’의 기치를 선명하게 휘날렸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자신을 수련하고 목회를 연구하는 일에 끊임없이 정진하셨고 이것이 성결교회 다음 세대 목회자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뒤늦은 나이에 풀러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셨다. 박사학위 논문은 ‘한국성결교회 성장사’였고 책으로 출판되어 성결교회의 귀중한 문헌이 되었다.

남가주교회협의회 회장 등과 미주 전체의 교회연합기관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셨다. 그 일의 하나가 ‘크리스천 헤럴드’의 창설 이사장으로 헌신하신 사역이었다. 창간 40년을 바라보는 크리스천 헤럴드의 초석을 놓는 일에 안 목사님은 크게 헌신하셨다. 글쓴이가 크리스찬 헤럴드의 초대 주필로 섬기게 된 것도 안 목사님의 격려가 큰 도움이 되었다.

안 목사님은 늘 자신의 교회가 대형교회로 성장하지 못한 데 대하여 안타까워하셨지만 그분께서 미주에서 시작하신 성결교회는 여러 가지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200여 교회로 성장했다. 한인교단 가운데는 교단본부 건물을 첫 번으로 마련하게 된 것도 안 목사님의 헌신과 결단의 열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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