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권혁승 교수
이삭 배우자의 조건은 무슨 의미가 있나?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의 배우자 선택을 위임받은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나홀의 성으로 가면서 순조롭게 이삭의 배우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12절) 그러면서 그는 특별한 조건을 제시했다. 물을 길으러 나온 소녀에게 물동이를 기울여 물을 마시게 해달라고 요청할 때,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그가 끌고 갔던 열 필의 낙타에게도 물을 먹이는 소녀가 곧 이삭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배우자가 되겠다는 것이다.(13~14절)

그가 기도를 마치자마자 리브가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물을 길으러 나왔고, 물을 먹게 해달라는 그의 요청에 리브가는 열 필의 낙타까지 물을 먹이는 적극성을 보여주었다. 이에 아브라함의 종은 그녀가 이삭을 위한 배우자임을 확신하였다.

왜 아브라함의 종은 그런 특별한 조건의 기도를 드린 것일까? 그것은 이삭의 약점을 보완할 배우자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결혼은 상대방의 장단점으로 모두 고려해야 하는 전인적 통찰이 필요하다. 이삭은 모든 사람들을 편안하게 대해주는 좋은 성품의 평화주의자였다. 그런 점은 그가 판 우물을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두 번씩이나 양보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창 26:20~21) 그러나 이삭의 그런 장점은 동시에 단점으로 드러났다.

대표적인 예로 장자인 에서에게 장자의 명분을 넘겨주려고 한 것이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동생인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넘겨주시기로 작정하셨는데도 이삭은 그런 점을 무시한 것이다. 이삭은 장자를 우선시하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그대로 따라가는 보수주의적 성향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쳐 하나님의 섭리마저 제대로 읽지 못하는 우를 범한 것이다.

그런 문제를 해결한 인물이 이삭의 아내 리브가였다. 그녀는 사회적 관습보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더 중요시하는 영적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야곱이 자신을 위장하여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리브가의 적극적인 개입과 도움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리브가는 이삭으로 인해 잘못될 수 있었던 장자권의 흐름을 하나님 뜻에 맞도록 바로 세워주는 역할을 했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배우자를 구하는 조건으로 제시한 기도제목은 이삭의 약점을 보완하여 하나님 역사를 이어갈 협력자를 구하는 지혜로운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삭의 참다운 ‘돕는 배필’을 구하는 기도이기도 했다. 부부로서의 ‘돕는 배필’은 인격적 동등성과 함께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여 온전함을 이루는 상호보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유다는 왜 다말이 자신보다 더 의롭다고 하였는가?
다말은 가나안 여인으로 유다의 첫째 아들 엘과 결혼하여 맏며느리가 되었다.(창 38:6) 그러나 불행하게도 엘은 자녀 없이 죽게 되었고, 다말은 시형제결혼제도에 따라 시동생인 오난을 통해 자녀를 낳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을 거부한 오난이 죽게 되자 유다는 나이 어린 시동생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다말이 친정집에서 지내도록 조처를 취하였다.

그러나 셀라가 결혼적령기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다말을 데려오질 않았다. 이에 다말은 창녀로 위장하여 그녀의 집 근처로 올라온 시아버지 유다와 성관계를 갖고 임신을 하게 되었다. 며느리의 임신이 행음에 의한 것이라고 오해한 유다는 다말을 끌어내어 불태워 죽이려고 하였다. 그때 다말은 유다에게서 얻은 증거물들을 보여주면서 유다가 자신을 임신시킨 장본인임을 밝혔다. 그러자 유다는 “그는 나보다 옳다”라고 고백하였다.

과연 다말의 무엇이 유다보다 옳은 것일까? 여기에서 ‘옳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챠데크’는 법정에서 재판장이 최종적으로 재판에서 이겼음을 선언할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유다와 다말과의 법적 투쟁에서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는 다말의 손을 들어주셨다는 것이다. 다말이 보여준 행동은 시형제결혼제도를 시행하지 않는 시아버지 유다와 관련된다.

곧 자녀가 없이 형이 죽었을 경우에는 동생이 형수와 관계를 갖고 자녀를 낳아주어야 한다. 그것은 자녀생산으로 가문을 이어가는 것이 다른 어느 것보다 우선적인 과제임을 보여준다. 유다는 그런 우선적 가치를 무시했고, 다말은 온 몸을 던져 유다의 잘못된 처사에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부름을 받아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의 초기 역사는 아브라함으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깊이 관련된다. 그런 강조점은 요셉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창세기 전체 내용의 기본바탕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자손번성은 창세기의 다른 어느 주제보다 우선적인 강조점을 지닌다. 다말이 그런 우선순위에 목숨을 걸고 도전한 것이다. 그것이 창녀로 위장하여 시아버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다말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 앞에 ‘옳다’라는 평가를 받게 된 근거이다.

바로는 왜 요셉을 아스낫과 결혼시켰는가?
바로가 요셉을 총리로 임명하고 난 후 그가 취한 마지막 절차는 요셉에게 ‘사브낫바네아’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면서 그의 결혼을 주선한 일이다.

그것은 노예 신분이었던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발탁한 파격으로 인한 사회적 충격을 완화시키는 조처라고 할 수 있다. 바로가 요셉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주선한 것도 그런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곧 바로는 요셉을 완전한 애굽인으로 만들기 위해 정략결혼을 활용하여 신분세탁을 한 셈이다. 

바로가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요셉의 결혼 상대자로 선택한 것은 나름대로 신중한 고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요셉에게 주어진 애굽 이름인 ‘사브낫바네아’ 속에 담겨있다. 요셉의 애굽식 이름은 애굽어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그가 산다’(God speak and He lives)라는 뜻이다. 바로가 요셉의 이름을 그렇게 지어준 것은 그가 지닌 꿈 해석 능력 때문이다.

요셉은 당시 애굽의 유력한 제사장 가문출신인 아스낫과 결혼함으로 이방인 출신의 노예라는 부정적인 신분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에게 한 가지 남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어떻게 요셉과 같은 경건한 인물이 이방 제사장의 가문과 결혼할 수 있느냐이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정확한 답을 내놓고 있지 않다. 그러나 본문의 전후 문맥 속에 그에 대한 답이 간접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첫째로 고려해야 할 것은 요셉이 스스로 아스낫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가 요셉을 총리로 임명하면서 주선한 일이었다. 결국 요셉의 총리 임명과 함께 그에게 주어진 부수적 결과가 아스낫과의 결혼이이었다. 결혼 후 요셉은 자신의 아내에게 히브리신앙을 철저하게 가르쳐 지키게 하였을 것이다. 그런 점은 후에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받아들여 열두 지파의 수장으로 삼은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창 48:5) 아스낫이 자녀들에게 바른 신앙교육을 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로 고려할 것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신 것이 후에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려는 특별한 섭리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요셉과 아스낫의 결혼은 자손번성이라는 관점으로 조명되어야 한다. 창세기 본문은 아스낫과의 결혼으로 요셉에게 주어진 신분상승과 그로 인한 혜택들에 대한 언급은 거의 생략한 채 이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큰 관심을 집중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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