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의 ‘납북, 그 순례의 길’을 추적하며 -

류재하 목사
1930년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 복음을 접하고, 교역자로 헌신한 후, 일제에 의한 수난과 광복 후 5년 간 지속됐던 민족정체성의 혼란 속에서도 가는 곳마다 성장하는 목회와 신학교수·문서선교로 교단과 교계에 역동적으로 활동하시다 1950년 6·25전쟁때 납북되신 고 김유연 목사! 

그의 장남인 김성호 목사가 해마다 6월이면 아버지가 그리워 눈물 흘리다 아버지가 납북된지 66년 만에 가슴에 맺힌 그리움과 한을 편지형식으로 토해낸 책이 ‘납북, 그 순례의 길’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6·25전쟁은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우리 민족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울분의 역사다. 민족의 안보와 정체성 확립의 콘텐츠로 삼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출간한 김성호 목사의 ‘납북, 그 순례의 길’의 독자들은 과장 없는 아픔과 그리움이 가득한 작가의 뜻에 쉽게 공감하고 가슴 뭉클함을 느낄 것이다. 그 이유를 살펴본다.

첫째는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가 3가지로 나타나는 문학작품이다.
하나는 물이다. 김유연 목사의 이름은 ‘연못’이란 뜻이고, 호는 일수(一水)였다. 그는 이름처럼 물처럼 고결하게 살면서, 만물에 생명을 움트게 하고 기름지게 하는 물의 철학으로 산 신앙의 거인이었다.

둘은 돌(石)이다. 6·25전쟁 발발 이틀 후인 27일 아현동 신학교 강의실에서 북한군의 대포소리가 들려오는 속에서도 칠판에 옛 중국시인 두보의 시 ‘江流石不轉’(강물이 흘러도 돌은 구르지 않는다)를 쓴 후, “빨리 피난가시오. 난 신학교와 교회를 지키겠소”라고 했다. 그래서 납북됐다.

셋은 바보다. 당시 고인은 목회면 목회, 교수면 교수, 활천 주필과 한국기독공보의 주필로 문서선교 개척자로 다재다능했다. 그런데 왜 바보인가? 남들처럼 얼마든지 피난 갈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 잡혀간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역설적 부르짖음이다.

그러나 아들은 안다. 또 우리 모두가 안다. 그는 바보가 아니라, 십자가를 스스로 진 주님의 참된 제자였다는 사실을. 이런 이미지들을 통해 우리는 고인의 인성, 덕성, 영성을 흠모하며 참 지도자상을 배운다.

두번째 해마다 6월이면 부친이 생전에 관여했던 곳을 찾아 그리움의 사연을 적은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아들의 애틋한 뜻에 독자들은 넋을 잃는다.

아들은 부친의 고향인 황해도 옹진반도가 보이는 연평도를 시작으로 만리현의 옛 집, 안성교회의 언덕길, 신의주가 바라보이는 중국의 단동, 서울 무교동 옛 교회당, 그리고 목회하다 납북된 공덕동 111의 10번지를 찾아 눈물의 종이비행기를 날린다. 수신처인 그 나라 111의 10은 고인의 마지막 현장, 공덕동의  주소는 떠남과 만남을 이어주는 유일한 교차점으로, 주님 재림 시 만남으로 승화시켜 소망으로 살아가는 가족의 삶에 가슴이 울먹하다. 

세번째 아버지 납북의 의미를 헌신으로 승화시킨 아들의 결단에 독자들은 박수를 보낸다.
놀라운 것은 이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존경이 마침내 아들을 새롭게 거듭나게 하여, 6·25전쟁 중 연세대 학생에서 부산 피난 신학생으로 헌신케 한 것이다. 그래서 군목과 목회자가 되어 아버지처럼 교단과 교계에 역동적인 활동을 이어왔다.

또 부친이 두고 간 가족들을 잘 돌보아 우리 교단 최초의 3대목사를 배출했다. 책에서 김 목사는 하나님과 민족 앞에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담담히 기록하여 감동을 준다. 마치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한 말 “아버지, 이만하면 나도 할만큼 했지요?“하고 눈물 흘리던 모습이 엿보여 감동이다.

마지막으로 아쉬운 것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몇 군데서 맞춤법이 틀린 것으로 이는 모든 책마다 겪는 고통이며, 동시에 이 좋은 6·25콘텐츠가 책으로만 머문다는 사실이다. 책보다는 영상을 선호하는 세태를 감안한다면 이 소재를 최소한 다큐멘터리나 단편영화로 제작하는 문화선교 차원의 움직임이 시작되는 소망을 꿈꾸어 본다. 이를 위해 기도하며, 붓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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