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원하고 아내를 다스리라?

이성훈 목사
집에서 들려오는 자녀들의 웃음소리는 우리를 무척이나 기쁘게 합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서 주신 말씀을 묵상하노라면 우리가 ‘항상 기뻐하며’ 사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다 기뻐하고 감사할 조건입니다만, 가정이 주는 기쁨만큼 더 큰 행복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축복이 되어야 할 가정 때문에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만일 가정이 축복보다는 고통과 저주라고 여겨진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죄를 지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하기 전 하와를 아담이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창조하셨습니다. 이 고백 속에서 누가 누구보다 우위라고 하는 사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드실 때에 하와를 아담의 갈비뼈를 사용하셨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하와도 흙으로 창조하실 수 있으셨지만 하와를 아담의 갈비뼈로 만드심으로 이제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내 살이요 뼈라는 말이 완벽하게 성립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아담에게 하와는 뼈였고, 살이었던 반면 하와는 남자의 돕는 배필이었습니다. 지난 호에서 돕는 배필이란 말을 깨어진 반쪽 거울의 예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깨진 거울을 가지고는 나의 모습을 온전히 보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그와 반대되는 쪽을 가지고 맞추어 온전한 거울이 되면 그 때서야 비로소 나를 온전히 비추어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두 사람은 서로 돕는 가장 아름다운 동역의 관계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이러한 창조 원리를 잔인하리만큼 철저하게 깨버리고야 말았습니다. 그들을 꾄 뱀과 두 사람 모두 저주를 받게 되었는데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두 사람의 관계의 깨어짐이 그 대가였습니다.

창세기 3장 16절에서 볼 수 있듯이 “너는 남편을 원(히.트슈카)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리게(히.마샬)”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자칫 그 전에는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남편을 사모하고 따르게 되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이 말씀은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트슈카를 번역한 ‘원하고’(16절)라는 말은 본래 ‘요구하다’ 혹은 ‘강요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 질서인 ‘돕는 배필’로서 살아야 할 하와가 이제는 ‘여자가 남자를 주도하고자 하는 관계의 성향으로 변질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본래 계획하셨던 질서를 파괴하는 하와의 타락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즉 16절은 아담과 하와 사이에 아름다운 상호 동역관계가 틀어져 버렸음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은 표현입니다.

그리고 남편 역시 하와를 향한 최초의 고백이었던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였던 관계는 사라지고, 아내를 ‘다스리’(히.마샬 16절)고자 하는 잘못된 관계에 들어서는 모습으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두 사람은 상호 보완적이 아닌 피차간에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서로 서로에게 주종 관계를 요구하는 관계로 전락해버린 것입니다.

감사 가운데 죄로부터의 구원만큼 더 큰 감사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구원은 개인은 물론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가정에도 해당됩니다. 가정의 구원이라 함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본래의 창조 원리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원리란 남편과 아내가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며 서로를 향하여 뼈요 살이라는 고백과 더불어 창조 질서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구원 받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함으로 가정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는 일에 목숨을 거는 크리스천 가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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