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가 이슬람으로 인해 시끄럽다. IS의 테러가 곳곳마다 충격과 공포를 주고 있으며, 오랜 이슬람 노동이민을 받아온 유럽은 이슬람권의 인구 증가와 그로 인한 영향력, 그들 사이에 숨은 테러리스트들 때문에 고민 중이다. 더구나 자생적 테러리스트인 일명 ‘외로운 늑대’로 인해 미국과 유럽 등은 뾰족한 대책을 세우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 사회는 이런 흐름에서 벗어난 안전한 사회인가? 결코 그렇게 자신할 수만은 없는 게 현실이다. 결혼 이민, 노동자 유입, 무슬림 유학생 등 작지만 눈에 띄게 이슬람권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한국인 무슬림이 국회의원 비례대표에 응모하는 등 서서히 정치권에도 접근하고 있다. 이슬람 금융이 우리나라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칠 뻔한 위기도 있었다. 이미 유학생들을 많이 받아들인 학교는 이슬람 기도실을 만들어주는 등 그들의 문화를 존중해 주고 있다. 학교에서도 이슬람의 종교적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유럽 등 서구권이 직면하고 있는 이슬람의 영향력을 살펴봄으로써 반면교사를 삼고, 대비할 수 있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먼저 질문할 것은 다음 두 가지이다. 사회의 하층부에 파고든 이슬람이 어떻게 서구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그들의 문화를 유지하고 고수할 수 있게 되었을까? 그리고 오히려 서구 유럽인이 IS 전사가 되는 등 이슬람화되는 사례가 등장함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그 중요한 원인으로 서구 문화권의 취약성을 들 수 있다. 그들은 ‘프라이버시’를 우상으로 섬기는 개인주의 문화권이다. ‘관용’과 ‘다양성’이라는 미명으로 포장한 다원주의 사회이다.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여성권리와 소수자의 권리가 강조되고 그에 편승하여 동성애자들이 득세하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윤리적인 기준점을 상실한 인본주의적 질서가 대세이다. 과거 기독교 문화의 영향력이 강했지만 하나님을 점점 떠나면서 그 은혜의 그늘을 벗어나게 되자 인본주의란 가면 뒤의 사악한 가치관들이 힘을 쓰고 있는 현실이다.

이슬람 문화는 서구사회의 취약성을 대치해 주는 좋은 대안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슬람 사회는 아직 공동체 문화를 견고히 유지하고 있다. 왜곡된 가부장적 질서이지만 겉으로만 보면 가정 중심의 공동체 질서, 국가와 사회가 일치된 단결력을 보여준다. 그들은 복잡한 윤리적 담론 대신 그들의 경전인 ‘꾸란’을 중심으로 분명한 윤리관을 보여준다.

여권이나 동성애 등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인본주의의 도도한 물결 속에서도 유일신 신앙의 신본주의 가치관을 유지하고 있다. 필자는 결코 그들을 옹호하거나 두둔하려는 것이 아니다. 포스트 모더니즘과 다원주의 사회의 복잡함에 머리 아픈 대중에게는 오히려 그들의 단순한 윤리와 가치관, 행동 양식이 신선해 보일 수 있다는 현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그들은 거짓된 기초 위에 그런 가치관과 윤리를 쌓고, 유지하고 있지만 서구권이 망각하고 있는 것은 원래 이런 가치관은 기독교 문화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이슬람은 그 좋은 유산을 왜곡하여 모든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사회를 이루었고, 기독교는 모든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은혜와 진리의 사회로 만들었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기독교만큼 공동체를 강조하는 종교가 있는가? 예수 안에서 민족과 계층, 인종을 초월하여 한 가족이 된다. 하나님 말씀은 분명하고도 바른 기초 위에 있어서 기독교를 받아들일 때 그 사회는 고도의 윤리적 기반 위에 세워지게 되었다. 사회적 약자는 보호받았고, 동성애 문제는 인권이 아니라 윤리 문제로 분명하고 단호하게 다루어졌다.

이슬람 문제의 대책은 다양하겠지만 이슬람 포비아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답은 기독교가 기독교답게 되는 것이다. 건강한 교회를 만드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다. 이단 문제도, 이슬람 문제도 교회가 말씀 위에 든든히 서게 될 때 극복이 가능하다. 가짜는 진짜를 이길 수 없다. 진짜 기독교인이 될 때에만 이슬람의 도전에 응전할 수 있다. 점차 다가올 이슬람 문화권도 감동, 변화시킬 수 있는 진짜 기독교인들이 되어 미래를 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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