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십자가

저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니 형편없다고 하는 표현이 더 알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림을 볼 줄 아는 능력도 없는 것 같습니다. 유명한 화가의 작품을 보면서도 그 그림이 왜 걸려져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 인상에 깊이 남아 있는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레오나드 다빈치의 ‘모나리자’라고 하는 작품입니다. 신기하게도 어느 위치에 서서 봐도 모나리자의 눈동자는 저를 향해 있습니다. 물론 그 작품이 신기하여 누구든지 다시 그리려고 하는 시도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흉내만 낼 수 있을 뿐, 똑같이 다시 그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원 작품 모나리자를 재현하여 그리기 위해서는 오직 한 사람 레오나드 다빈치가 살아나야 가능 할 것입니다.

헬라어에 ‘다시’라고 하는 표현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폴린’이라는 말과 또 하나는 ‘아노센’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용어를 구별해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나리자의 작품 이야기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레오나드 다빈치가 아닌 일반인이 모나리자의 작품을 그리려고 하는 시도는 ‘폴린’(‘다시’)이라고 하는 헬라어입니다. 따라서 ‘다시’(‘폴린’) 그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일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레오나드 다빈치가 살아나서 다시 모나리자를 그리려고 하는 행위를 일컬어 ‘아노센’(‘다시’)이라고 말합니다. 즉 ‘아노센’(‘다시’ ‘거듭’)이라고 하는 행위는 오직 그 결과의 주체자였던 한 명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어느 날 니고데모라고 하는 사람이 밤에 은밀히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은밀히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그가 유대교의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종교적인 문제를 판단하는 일을 했었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은 예수님과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예수님은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 종교인들과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은 성전에서 매매행위로 이득을 보던 이들과 결탁이 되어 있었기에 예수님을 보는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습니다. 아마 니고데모가 해야 할 임무 중 하나 역시 예수님의 행위를 판결하는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평소에 예수님께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니고데모가 은밀히 밤에 찾아온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어렵사리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의 화법은 무안하리만큼 직설적이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관심은 그 사람의 선한 행위나 그의 사회적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국어성경에 ‘거듭’이라고 하는 말이 원문에서는 ‘폴린’이 아닌, ‘아노센’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주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은 오직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은혜로 시작하였다가 나도 모르게 내 의를 고집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죄성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마치 니고데모가 율법을 지켜야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어머니의 수고와 노력으로 아기가 태어나는 것처럼 ‘다시 태어나는 일’은 오직 우리를 창조하신 그 분만이 행하실 수 있는 가능한 행위(헬.아노센)입니다. 이는 ‘태어나다’(헬.겐네세)라는 말이 수동태로 쓰여진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 분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에 가능하였고,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중보하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롬 8:34) 우리의 희망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나와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고 구원하고자 하셨던 그 분이 십자가에 달려셨다는 데 있습니다. 이는 십자가가 우리 인류의 유일한 희망인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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