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 전 모 신문의 칼럼에서 이솝 우화 ‘토끼와 거북이’의 내용이 한·일 교과서가 다르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교과서는 달리기를 못하는 거북이가 토끼의 잠자는 틈을 타 경주에서 승리한다는 내용인데 일본 교과서는 거북이가 잠자는 토끼를 깨워 손잡고 함께 골인한다는 내용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사실이라면 일본은 참으로 부러워할만한 교육철학을 지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교과서는 상대의 방심을 이용해서라도 이기면 그뿐이라는 승리지상주의를 말하고 있는 반면, 일본 교과서는 정정당당한 승부로 더불어 살자는 상생과 화합의 교훈이 녹아있는 훈훈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26일 막을 내린 교단 제 110년차 총회는 화합과 일치의 기미가 엿보인 총회였다는 점에서 잊혀져가던 ‘토끼와 거북이’ 일본 버전을 다시 떠올리게 했습니다. 사회를 보시는 여성삼 총회장은 껄끄러운 대의원일지라도 흔쾌히 발언권을 주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같은 편(?)이라고 여길 수 있는 대의원의 발언은 자제하도록 하는 등 총회의 화합과 일치를 위해 멋진 회의 진행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고무되었는지 야성이 강한 분들도 스스로 자신들의 제안을 취소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동의가 부결되어도 파안대소하며 총회석상을 밝게 만들었던 것은 제 110년차 총회가 화합과 일치의 총회가 될 것이라는 부푼 기대를 갖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제109년차 총회에서 소환당해 그 지위를 상실당한 제108년차 재판위원과 헌법연구위원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크게 잘못했기 때문에 소환 청원이 통과 되었고 이번 재판위와 헌연위는 잘했기 때문에 소환 청원이 부결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자도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을 것이고 후자도 실수한 부분이 있기에 소환 청원 당한 것이지만 교단 내에 흐르고 있는 역학구도에 의해 희비가 갈린 것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항존위를 소환하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총대들의 뒤늦은 자각도 작용한 측면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일종의 희생양이 된 전자를 위로·격려해야 함은 물론, 결코 소외되는 일이 없도록 배려하며 교단 발전을 위한 대열에 합류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아프리카 반투족에겐 ‘우분트’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다’는 뜻입니다. 한 인류학자가 반투족 아이들에게 나무에 걸린 과자 따먹기 경쟁을 시켰지만 아이들은 ‘우분트’를 외치며 함께 손 잡고 걸어가 과자를 나눠 먹었다고 합니다. 그 때 그 학자가 “한 명이 먼저 가면 다 차지할 수 있는데 왜 함께 갔지?”라고 묻자 아이들은 ‘우분트’를 외치며 “다른 사람들이 모두 슬픈데 어째서 한 명만 행복해 질 수 있나요?”라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고(故)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자주 인용하여 지구촌에 알려진 이야기인데 이제 우리도 ‘우분트’의 정신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우분트’, 곧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다’는 말은 ‘당신이 없으면 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분들이 있기에 내가 있고, 나와 성향이 다른 분들이 없으면 나도 없다는 ‘우분트’의 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우리 교단의 현 주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우분트’를 외치며 이솝 우화 ‘토기와 거북이’의 일본 버전처럼 힘을 잃고 주저앉아 있는 동료의 손을 잡아 일으켜 함께 교단의 부흥과 발전을 향하여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외고의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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