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대 제3회 길보른 정기 학술강좌
어니스트·엘마 길보른의 삶과 사역 조명

▲ 제3회 길보른 학술강좌가 5월 23일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렸다. 이날 강좌에서 강사들은 길보른 가의 대를 이은 헌신적 사역을 조명했다.
서울신학대학교 제3회 길보른 학술강좌가 지난 5월 23일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렸다. 서울신대 대학원(원장 정인교 교수)이 주관한 이날 강좌에서는 박문수 박사(서울신대)와 박명수 박사(서울신대)가 길보른 가의 대를 이은 헌신적인 사역을 소개했다.

‘어니스트 길보른의 생애와 선교사역’을 주제로 발제한 박문수 박사는 어니스트 길보른으로 시작된 길보른 가의 선교활동과 사역의 특징에 대해 발표했다.

박 박사에 따르면 어니스트 길보른은 1907년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창립할 당시부터 가장 빈번하게 한국을 방문한 사람이었다. 또한 동양선교회의 한국사역을 직접 지휘하며 감독 겸 경성성서학원장으로 활동하는 등 초기 성결교회 사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

어니스트 길보른의 사역은 해방 후 손자들이 이어받았으며 에드윈 길보른은 서울신학대학 학장으로, 엘마 길보른은 각종 사회복지 사업으로 한국사회와 성결교회의 부흥에 기여했다.

박문수 박사는 어니스트 길보른의 사역의 특징으로 ‘토착민 전도자 양성’과 ‘순복음 전도’를 들었다. 그는 “어니스트 길보른은 외국인들의 선교보다 현지인을 통한 선교가 효과적임을 깨닫고 동양선교회 사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며 “대부분의 회심자들은 토착 전도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며 선교사보다 토착민이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현지인을 교육하는데 주력했다”고 말했다.

또 박 박사는 한국성결교회 기원에 대한 생각도 밝혔다. 그는 “한국성결교회의 역사적 기원은 동양선교회에 뿌리가 있다”며 그 이유로 ‘초기 한국성결교회 명칭이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었다는 사실’과 ‘동양선교회의 선교정책이 토착민 전도자를 양성하고 앞세웠던 사실’, ‘교단헌법에 명시된 내용’ 등을 제시했다.

그는 “앞에서 제시한 내용들을 볼 때 한국성결교회 기원은 만국성결연맹이나 자생적 기원설 보다동양선교회 기원이 더 자연스럽다”고 주장했다. ‘엘마 길보른과 전후 한국 교회의 재건’을 주제로 발표한 박명수 박사는 6·25전쟁 후 활동한 엘바 길보른의 사역과 영향에 대해 강연했다.

박명수 박사에 따르면 엘마 길보른은 다른 길보른 가의 사람들처럼 고분고분하며 순종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독불장군 식의 성격 때문에 동양선교회와도 마찰이 잦았으며 의견대립도 많았다. 그러나 이런 그의 성격은 한국 교회를 지원할 때 오히려 빛을 발해 미국 등 주요 지원국들이 한국에 대한 지원을 줄이거나 떠날 때 끝까지 남아 한국교회의 교인들을 위한 지원을 중단하지 않은 것이다.

또 엘마 길보른은 한국전쟁 후 동양선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추진했던 구제 사업의 핵심 인물이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황폐화되었던 한국성결교회의 재건은 엘마 길보른의 구제사업으로 대부분 이뤄졌다. 그는 각 교회와 목회자들을 위한 모금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의 활동은 한국성결교회가 다시 재건될 수 있는데 큰 영향력을 끼쳤다.

박명수 박사는 이후 한국성결교회가 월드비전, WRC와 같은 국제 구호단체와 협력을 맺게 되는데도 엘마 길보른의 역할이 컸으며 엘마 길보른의 사역은 한국전쟁 후 군사정부에까지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엘마 길보른의 구호사업은 전통적인 전도사역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그의 사역은 한국성결교회와 한국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며 “엘마와 동양선교회가 60년대 성결교회에 끼친 영향력과 서울신대 운영, 특수전도 사업 등은 이후에도 연구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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