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종(朴完種)의 성장과 한의사 생활

박완종은 1897년에 충남 아산군 신창면 창암리에서 출생했다. 부친 박헌국은 오랜 가문의 전통인 유교관습에 철저했고, 대궐 같은 큰 집에 수십 명의 머슴들을 거느린 부유한 양반이었다. 완종은 6살 때부터 집에 한문선생을 하루 2시간씩 모시고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배우다가 15살 때 사서삼경까지 마쳤다.

이듬해 16살 때 예산에 사는 허정경 규수와 혼인하여 한 가정을 이루었다. 전 같으면 으레 과거에 응시하여 출세의 길을 노렸겠지만, 그가 혼인한 1913년은 불행히도 5백년을 이어온 조선이 3년 전에 멸망하였기 때문에 나라를 잃어버린 백성으로 큰 뜻을 이룰 수 없는 한을 가슴에 안고, 대농을 경영하는 부친을 도우며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1928년 그의 나이 25살 때 부친이 감기로 고통을 하자, 동네 한약방에서 지어온 약으로는 어림이 없어 그가 친히 온양 읍에까지 걸어가서 가장 유명한 약방에서 처방을 해왔지만   쉽게 낫지가 않았다. “아, 시골의사들은 모두 엉터리구나.” 이렇게 생각한 그는 자기가 한의사가 되어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들었다.

“그렇다. 돈이 있다고 이렇게 젊은 나이에 시골구석에서 땅만 파먹으며 허송세월만 할 수 없다. 한의사가 되어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병이 나은 부친에게 그의 결심을 허락 받았다. 그는 그 길로 서울로 올라갔으나. 한의사를 양성하는 기관이 별로 없어서, 가장 유명하다는 박성봉 한의사가 경영하는 곳에 가서 자기의 이력과 뜻을 밝힌 후, 조수로 들어가 배웠다.

그는 한의사를 지망하는 여러 명의 조수들과 함께 경쟁적으로 열심히 배웠다. 머리가 영리한 그는 한번 배우고 익힌 것은 잊어버리지 않아 성적이 사람들에 비해 탁월했다. 보통 조수생활을 2~3년을 해야 흉내를 낼 수 있다는데, 그는 1년 만에 병의 진맥부터 한약 제조법까지 터득하여 한의사로서 주목과 사랑을 받았다.

1929년에 한반도를 지배한 일제는 조선의 한의사제도에 의구심을 품고, 한의사 자격시험을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실시했다. 이 시험에 합격하여 면허를 따야만 한의사와 한약 제조를 함께 할 수 있었다. 전국에서 이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수백명의 지원자가 몰려왔다.

박성봉 한의사의 조수들 중 경력 2년 이상된 자들이 응시했지만, 박완종이 간청하자 예비시험삼아 함께 응시하도록 했다. 시험과목은 진맥과 약 처방, 그리고 침과 뜸 등 다섯가지였다. 시험 결과 박완종이 합격했다. 같은 박성봉 한의사의 조수들 응시자 4명 중 박완종을 포함하여 2명만이 합격했다. 그처럼 어려운 시험이었다. 일종의 한의사 과거시험 같은 것이어서 박완종은 물론 그의 가문의 경사였다.

그는 의술로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겠다는 사명감 때문에 즉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집에서는 크게 잔치를 벌이고 동네 사람들을 모두 초청하여 그의 장래를 축원했다. 그는 몇 달 후, 아산 읍으로 가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 있는 큰 집을 사서 한의사 개업을 했다. 아직 아산에는 면허를 받은 한의사는 박완종 뿐이어서 환자들이 몰려왔다. 그렇지만 그는 얼마 후, 더 큰 예산읍으로 갔다.

예산은 아산보다 사람도 많고 더 발달해서 그는 큰 집을 사서 개축한 후, ‘광제당’ 한의원 간판을 걸고 개업했다. 그가 한의사 시험에 합격한 의사라는 소문을 듣고 환자들이 몰려왔다. 그는 당장 예산읍의 유지로 통했고, 유명인사가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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