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과 유혹은 전혀 다른 동기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에 대한 해석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인간의 본질을 강조하는 본성적 해석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내적 본성인 정신적 능력이나 지식, 의로움, 거룩함 등이 포함된다. 인간은 “하나님을 따라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새 사람”(엡 4:24)이다.

둘째 하나님과의 교류를 강조하는 관계적 해석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말씀을 듣는 상대이면서 또한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는 책임적 인격체로 존재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는 동반자 관계이다.

셋째 인간의 사명과 역할을 강조하는 기능적 해석이다. 고대시대 왕은 자신의 통치지역에 지방장관을 임명하면서 자신의 형상을 함께 보냈다. 그것은 그 지역에 대한 왕적 통치권이 위임되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인간을 하나님의 지상대리자로 삼으셨음을 뜻한다. 인간은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왕적 지배권을 위임받은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출 19:6; 벧전 2:9)

위의 세 가지 관점 가운데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기능적 해석이다. 그런 점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의 피조물을 다스리게 하는 것에 있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창 1:26) 인간에게 주어진 본성이나 그에 근거한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모두가 하나님의 지상대리자로서의 사명과 역할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성경이 강조하는 다스림은 강압적 권력의 지배가 아니다. 그것은 양들을 돌보는 참 목자의 모습 속에 담겨있는 섬김의 리더십이다. 예수께서 섬기는 자가 가장 큰 자임을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다.(마 23:11)

하나님께서는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에덴동산에 두셨을까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창 2:17)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얼마나 성실히 유지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가시적 지표이다. 인간은 하나님께 예속된 노예나 꼭두각시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인격적 동반자 관계로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임의로 먹되 오직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다.(창 2:16)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충분히 공급해 주셨다. 풍성한 삶을 위하여 에덴동산의 인간은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다.

그런 점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께서 인간과의 구별을 표시하기 위하여 설정해 놓으신 경계선이다. 그 경계선 안에 생명의 각종 나무열매들이 있다. 그리고 그 경계선 너머에 죽음을 의미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다.

생명을 소유한 인간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전혀 문제가 되질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유지가 잘 지켜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인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범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결과만을 놓고 본다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심으로 인간이 죄를 짓게 만드신 것이 된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 시험과 유혹의 구분이다. 시험(test)과 유혹(temptation)은 전혀 다른 동기로부터 상반된 결과를 가져온다.

시험은 인간이 지닌 높은 차원의 신앙과 성품을 자극함으로 잘못된 욕망을 극복하고 의를 행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반면에 유혹은 인간의 낮은 차원의 이기적 욕심을 자극하여 악을 행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인간이 유혹에 빠지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기 때문이다.(약 1:14)

에덴동산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의 정상적인 시험일 뿐 죄를 범하게 하는 유혹은 아니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범위 안에서 우리들을 시험하신다.(고전 10:13) 시험이 있기 전에 먼저 시험을 이길 신앙의 저력을 마련해 주신다. 에덴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먼저 생명나무를 비롯한 각종 나무열매를 임의로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그런 인간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전혀 걸림돌이 되질 않았다. 문제는 뱀이 행한 유혹이었다. 뱀은 인간의 자만심을 자극하여 그들 속에 숨어 있는 이기적 욕망을 끄집어내었다. 그것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이다.

결국 인간은 풍성한 삶의 충분조건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기적 욕심 때문에 하나님께서 설정해 놓으신 경계선을 무너뜨렸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자세히 주의하여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전 10:12; 엡 5:15)

‘돕는 배필’은 무엇을 뜻하는 건가요?
성경은 한 몸을 이룬 남편과 아내를 ‘돕는 배필’이라고 규정한다(창 2:18). ‘돕는 배필’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에제르 케네그도’인데, ‘도움’이라는 뜻의 ‘에제르’와 ‘그와 마주보고 서있는 것 같다’는 뜻의 ‘케네그도’가 결합된 합성어이다. 우리말 성경은 전자를 ‘돕는’으로 번역하였고, 후자를 ‘배필’로 번역하였다.

부부는 인격적으로 동등한 위치에 서 있는 관계이다. ‘케네그도’가 그런 점을 잘 드러내 준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피조물이며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하나님 생명의 소유자이다. 그에 비하여 ‘도움’을 의미하는 ‘에제르’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다른 역할을 하면서 상대방에게 도움을 주고받는 기능적 분담 관계에 있음을 뜻한다.

남편과 아내는 인격적 동등성 위에 서 있지만, 가정이라는 공동체의 유지와 조화를 위하여 각자가 지닌 서로 다른 기능을 상호 보완적으로 결합시켜야 한다. 인격적 동등성이 둘을 하나로 묶어주는 사랑에 대한 강조라면, 상호보완성은 서로 다른 역할에 대한 인정과 존경을 의미한다. 사도바울이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라고 한 것이 곧 다른 사람의 역할에 대한 인정과 존경을 지적한 것이다.

‘돕는 배필’에서 ‘배필’은 기본 바탕이고, ‘도움’은 그 바탕 위에 드러난 실제라고 할 수 있다. ‘돕는 배필’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에제르 케네그도’에서 ‘케네그도’는 선행 명사인 ‘에제르’를 수식하는 전치사구이다. 이는 ‘에제르’가 ‘돕는 배필’의 중심내용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곧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상호보완성의 ‘도움’은 구체적인 결실이라는 점에서 더욱 부각되어야 한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여도 부부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려면, 사랑에 근거한 인격적 동등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사도바울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 5:22)고 하면서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엡 5:28)라고 한 것도 그런 동등성 관계를 강조한 것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서로의 ‘도움’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과정이지 상하로 구분되는 계급적 관계의 복종이 아니다. 그것은 남편의 아내 사랑과 평행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