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를 방문하는 사람이면 바티칸 성당의 엄청난 규모에 압도당한다. 시스티나예배당의 천정화를 보면 역사를 이어온 문화의 축적과 그와 맞물린 기독교적 제도의 힘에 감탄을 금하지 못한다. 방문객이 그리스도인이면 일정을 어떻게 짜든 카타콤이 들어갈 텐데 이 장소가 바티칸과 확연하게 대조된다. 로마에 있는 어느 카타콤을 가든 상황은 비슷하다. 10미터 정도보다 깊은 땅 속에 들어가 생명을 이어갔던 그리스도인들, 그들의 흔적이 카타콤이다.

지난 오월 초순에 30명이 좀 넘는 사람들과 함께 거기에 들어갔다. 이천 년 전에 거기에 있던 사람들을 마음에 그렸다. 거기에서는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갖는 보호 장치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햇빛이 들지 않는 거기, 심지어 거기에 상당히 오래 머물다 나온 사람들은 시력에 심각한 장애를 입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분 이름에 생사를 걸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나뭇가지나 간단한 도구로 땅을 파 들어가며 기한이 없는 박해를 온몸으로 견디던 그 시대에 국가라는 것은 사실상 하나 곧 로마제국이었다. 일상적인 인식의 범위 안에서 로마가 세계 자체였다. 그리스도인들이 카타콤으로 숨어들던 그 시기는 로마가 가장 번창할 때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기도하며 다른 나라를 기다렸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카타콤에서 주님의 기도가 떠올랐다. 기도문 내용은 카타콤의 상황과 철저하게 충돌했다. 하늘은 보이지도 않고 게다가 땅 위의 삶을 포기하고 땅 밑으로 숨어든 상황에서 어떻게 이렇게 기도한단 말인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미로의 지하 터널을 전전하며 사는 그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게 해달라는 기도는 도대체 무슨 뜻인가? 용서하려는 대상은 누구인가? 그들의 목숨을 쫓는 추적자들인가, 그들을 밀고하고 자기 생명을 부지한 배반자들인가, 아니면 예수처럼 무조건적으로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들인가? 그들은 도대체 거기에서 또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도미틸라 카타콤 안에서 6평 남짓한 공간에 삼십 명 조금 넘는 사람들이 들어섰다. 얼마간 침묵했다. 이천 년 전 이곳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했다. 옆의 벽에 가로로 파진 작은 구멍이 있었다. 아이가 죽어 뉘였던 곳일 게다. 그 부모의 심정이 가슴을 베고 지나간다. 잠시 후에 함께 주기도문을 낭송하며 기도드렸다.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이 자유로운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신앙을 지키려고 숨어들던 그 땅 밑에서 ‘다른 주기도문’으로 기도했다. 거기에서의 주기도문은 참 달랐다.

기독교 신앙이 이천 년을 이어온 힘은 바티칸도 아니고 시스티나예배당 같은 예술품들도 아니다. 기독교 신앙의 비밀이 로마의 땅 밑에 있었다.

나흘 뒤에 우리 일행은 독일 비텐베르크에 있었다. 루터가 95개 논제를 붙인 성(城)교회에 들어갔다. 관리인의 허락을 받고 ‘내 주는 강한 성이요’ 그리고 ‘아리랑’, 두 곡을 노래했다. 바티칸과 카타콤이 확연하게 대조적이지만 바티칸과 비텐베르크 또한 철저하게 대조적이다. 일행에게 잠시 얘기했다. “여러분, 이것이 프로테스탄트입니다.”

내년이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한국 교회는 어디로 가려는가? 현재의 상황이 하도 불투명해서 좀 극단적으로 대비시켜 말해보자. 한국 교회가 가려는 길은 바티칸인가 아니면 카타콤인가, 바티칸인가 아니면 비텐베르크인가? 교단이나 기독교 단체들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준비하고 있다. 행사가 많다고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과 실존이 저절로 개혁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기획이나 행사도 없다면 문제이다. 우리 교단은 아직까지 종교개혁과 관련된 기획이 없다. 그래도 종교개혁 500주년인데….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