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는 인류의 소망입니다. 역사학자는 20세기를 ‘전쟁의 세기’로 규정합니다. 지난 100년 동안 전쟁과 혁명으로 인해 약 9억 명이 살상되었다고 합니다. 윌(Will)박사와 아리엘 듀란트(Ariel Durant)박사에 의하면 지구촌 역사에 91.6%의 시간에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평화롭습니까? ‘위장된 평화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국지전이 상시 일어나는 나라이고, 우리나라는 준 전시상태입니다. 북한은 대륙간탄도미사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등으로 계속 무력시위를 하고 있는 위험한 나라입니다. 평화는 인류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국가 간의 평화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평화도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평안하십니까?

대문호 톨스토이는 그의 저서 ‘참회록’에서 그가 예수를 믿기 전에 느꼈던 고독과 공허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생애에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나의 신념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고, 나 자신이 갈피를 잡을 수 없다고 느껴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나의 인생을 지탱해 줄 아무런 힘도, 신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밤마다 잠자리에 들 때면 한 밤중에 일어나서 서까래에 목을 매어 죽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집안에 모든 끄나풀은 완전히 없애버리도록 했고, 내 인생과 불행을 순간적으로 끝장내려는 유혹을 느끼지 않도록 사냥도 중지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평화롭지 못한 마음은 괴로움 그 자체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을까요?

본문 5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평화의 왕이신데 분쟁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일까요?

댓가를 지불하지 않는 평화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평화가 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절대기쁨, 절대평안, 절대감사, 절대만족이 옵니다. 맞습니까? 여러분, 모두가 확실하게 아멘 할 수 있나요. 혹시 ‘그렇지 않은데’…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진정한 평화를 누린다는 말씀에 동의하지 못한다면 나는 아직 평화를 얻기 위한 댓가를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평화 이전에 분쟁을 주러왔다고 말씀합니다. 분쟁을 치르지 않으면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분쟁은 다른 말로 하면 ‘의견차이’입니다.
중생하기 전의 가치관, 생각, 습관과 예수님의 말씀은 반드시 충돌(衝突)을 일으킵니다. 그 충돌이 있은 후 주님이 기뻐하시는 결정을 하고, 그 결정에 따라 살아갈 때에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가족과의 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존의 생각과 말씀이 충돌을 합니다.

진정한 평화는 말씀으로 순종할 때 이뤄집니다. 위장된 평화는 옛 습관, 가치관을 잠깐 동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가족이 원하는 대로, 세상이 원하는 대로 그렇게 수용하면 잠깐은 평화롭습니다. 분쟁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곧 깨집니다.

온전한 평화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주어집니다. 영적인 싸움은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선택은 내가 합니다. 내가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기로 결정하면 내 안에 진정한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평화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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