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드리느냐”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얼마 전의 일입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팔려고 온 이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개발한 프로그램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왜 이것이 반드시 필요한가를 나름대로는 꽤 열심히 설명하였습니다. 그들의 설명은 상당히 합리적이었고,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그 프로그램 구입하는 것을 미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딸 아이가 “아빠!” 하면서 무릎에 올라 앉더니만 자신의 요구사항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딸 아이의 부탁은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 아이의 부탁을 들어주려고 애쓰는 제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도 마찬가지라고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입니다. 무엇을 말하느냐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누가 말하느냐입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은 기쁘게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왜 이러한 결과를 가져왔는가에 대해서 궁금해 합니다. 이 사건에 대한 답변은 다양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양치는 자를 더 좋아하신다는 의견입니다.(Gunkel)

둘째는 제물로서 곡물보다는 짐승을 더 좋아하셨다는 견해입니다.(Skiner) 셋째는 하나님의 선택 신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von Rad) 넷째는 예배에 대한 태도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다섯째는 두 형제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다른 동기가 있었으며, 서로 다른 동기가 그들의 제물의 질을 결정하였다는 의견입니다.(Ko¨nig)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답변이 제시되었습니다만 사실 답변의 내용들이 그리 설득력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드린 제물을 가지고서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제물이 아니라 그 제물을 드리는 사람에 있습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아벨의 제물을 열납하였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벨과 그 제물’(4절)을 열납하셨다고 함으로써 그 제물을 열납하시기 전 우선 아벨도 열납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 뿐 아니라, ‘가인과 그 제물’(5절)을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문제는 가인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드리는 제물에 앞서 무엇보다 제물을 드리는 사람을 보셨던 것입니다. 물론 가인이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자세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고 해서 가인이 취한 태도는 용납하기 쉽지 않은 행동이었습니다.

5절에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히. 바이하르 레가인 메오드 바이플루 파나브)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이 말을 직역하자면 ‘그는 매우 화가 나서 그의 얼굴을 떨구었다’입니다. 특별히 ‘안색이 변하다’ (히. 바이플루)라고 하는 말은 가인이 하나님 앞에서 오만하고 무례하였음을 표현한 말입니다. 자기가 드린 제사와 모순되는 모습이요, 제사드리는 자가 가져야 할 태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인이 ‘악한 자였다’고 말씀합니다.(요일 3:12; 유 11) 이러한 악한 자가 드리는 제물에 대해서 성경은 “악인의 제물은 본래 가증하거든 하물며 악한 뜻으로 드리는 것이랴."(잠 21:27)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히브리서 11장 4절에서 아벨이 드린 제물이 가인이 드린 제물보다 더 나은 제물이라고 말씀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보면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신 반면 에서는 ‘미워’하신 이유가 되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말 1:2~3; 롬 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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