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 1:1~11)

흐르는 물길을 막으면 그 물은 썩고 맙니다. 정원의 나무는 보기에 아름답지만 폭풍우를 견딜만한 힘은 갖지 못했습니다. 지금의 삶이 안락하고 편안하다고 보다 큰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를 거부하면 그 편안함은 금방 불안감으로 바뀌게 됩니다.

지금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절대 포기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되고, 성공하여 영광 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그 성공에 만족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퇴보하고 맙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때가 바로 큰 부흥이 있은 후 교회의 본연의 모습인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을 그쳤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느헤미야는 은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이 되었습니다. 술 관원은 왕이 총애하고 신뢰하는 자리입니다. 포로민의 자식이 이렇게 빨리 성공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비록 출생이 좋지 않고, 자라온 환경이 열악(劣惡)했지만 최선을 다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가 성공한 진짜 이유는 ‘하나님의 선한 손이 그를 도왔기 때문(느2:8)’입니다. 그의 수고와 열심히 아름다운 결실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 즉 ‘은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은혜의 사람인 것은 지금 육신의 성공의  삶으로만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고, 성공한 사람이지만 그는 그 자리만을 지키려고 살아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성공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통로(도구)로 사용되기 위해 기꺼이 헌신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는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첫째 그의 관심은 늘 민족과 백성 그리고 성전이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은혜의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보통 사람의 관심은 세상적인 출세, 부자가 되는 것, 세상적인 자랑일 겁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관심은 이스라엘과 백성들, 그리고 성전에 있었습니다. 그는 틈틈이 고국 여행에서 오는 사람들은 붙잡고 예루살렘에 대한 소문을 물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동생 하나니가 예루살렘에서 돌아오자 느헤미야는 제일 먼저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백성들의 소식과 성전과 성벽에 관한 소식을 물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그가 얼마나 그 부분에 관심이 많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은혜로운 사람은 늘 교회에 관심이 있습니다. 교회의 사역에 관심이 있습니다. 교회의 형편이 어떠한가에 늘 관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느헤미야에게 은혜를 베풀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니를 통해 안타까운 예루살렘 소식을 듣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수일동안 슬퍼하며 하나님께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아무나 이렇게 하지 못합니다.

성벽이 훼파되고, 성문이 불탔다는 소식이, 그리고 예루살렘 백성이 많은 어려움을 당한다는 소식이 그에게는 그렇게 슬펐던 것입니다. 이것이 느헤미야의 영성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못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관심이 없다면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요즘 교회 부흥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성도의 수가 줄지만 않아도 대단한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현상을 보고, 이런 얘기를 들어도 그냥 덤덤합니다. 별로 안타까운 마음이 안 듭니다. 눈물은 나지도 않습니다. 그런 증상은 내 안에 은혜가 메말랐다는 증거입니다. 어찌 하나님의 역사가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는데 어떻게 태연할 수 있을까요? 어찌 안타까움에 눈물이 나지 않을까요.

느헤미야가 성공한 사람이 된 것은 그가 바로 은혜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사람은 그렇습니다. 은혜로운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역사의 주인공으로 쓰임받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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