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성결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누구인가’라는 한국성결신문의 조사에서 문준경 전도사가 이명직, 이성봉을 제치고 1위를 했다. 필자는 문준경 전도사가 이렇게 평가 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는 문준경의 이야기에서 한 조선 여성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양반집 가문에서 태어나서 시집을 갔으나 출산을 하지 못하여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다. 문준경은 비록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그는 남편을 버리지 못했다. 그가 전도사가 되어서 최초로 복음을 전했던 곳도 남편이 사는 동네였다.

둘째, 우리는 문준경에게서 한 순결한 크리스천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남편으로 버림받고 슬프게 살던 중, 문준경은 기독교인이었던 친척의 인도로 기독교신자가 되었다. 남편을 잃은 여인이 누구를 의지하고 홀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다. 한국성결교회는 예수를 신랑이라고 불렀다. 문준경에게 예수는 새로운 신랑이었다.  

셋째, 우리는 문준경에게서 한국 근대사의 갈등과 아픔을 듣게 된다. 1923년 9월 그가 태어난 전남 암태도는 큰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그것은 소작쟁의였다. 문준경은 전도사가 된 다음에 전남 신안군의 섬사람들의 ‘대신 거지’가 되었다. 빈부의 갈등을 이용해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키려는 좌익에 맞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대신 거지가 되었던 것이다. 

넷째, 우리는 문준경에게서 대중과 아픔을 같이하는 진정한 목자를 보게 된다. 사실 문준경은 암태도 유지 문씨 문중의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아들을 낳지 못해 남편의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보통사람들의 아픔을 잘 알고 공감할 수 있었다.

다섯째, 우리는 문준경에게서 한국사회에서 가장 훌륭한 여 전도자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한국교회 초기 여성들은 대부분은 교회에서 남자 교역자를 돕는 조역자의 위치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무도 가지 않는 섬에서는 다른 상황이었다. 문준경은 혼자 담임목사였고, 어쩌면 한국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여성 사역의 기회이기도 했다.

여섯째, 우리는 문준경에게서 해방 후 대한민국이 어떻게 건국되었는지 찾아 볼 수 있다. 문준경의 증동교회는 일제말 성결교회의 강제 해산 시에 친일조직인 경방단에 넘어갔다. 해방 후에 문준경은 이 건물을 다시 찾아 교회를 복구시켰다. 그러나 6·25한국전쟁이 벌어지자 같은 해 8월부터 증동교회는 인민위원회가 장악하게 되었다. 따라서 증동교회를 놓고 좌우익 간에 싸움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결국 같은 해 10월 5일 인민군은 물러가면서 문준경을 죽이고 말았다. 죄명은 ‘알을 많이 깐 씨암탉’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문준경에게서 여러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을 버린 남편 대신 예수를 신랑으로 모시고 산 신자이며, 혁명 대신 사랑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봉사자이며, 대중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목자였고, 기독교의 복음으로 공산주의를 막고 대한민국을 세우는데 기여한 애국자였다. 문준경이 왜 1위의 인기를 갖게 되었는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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