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이정근 목사
삼십대 후반 전도사 때 로스앤젤레스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그 때 어떤 도넛 가게에 전도 차 들렀다. 빵과 커피를 사려는 손님들 틈에서 기다리다 내 차례가 되었다.

“안녕하세요? 이 근처에 교회를 개척한 전도사입니다. 혹시 교회에 다니시나요?” 바쁜 시간이니까 요점만 말했다. 40대쯤 된 가게 주인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더니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니, 무어 해 먹을 게 없어서 전도사를 하슈? 개척교회는 월급도 제대로 못 주면서 말만 많던데… 골이 비었구먼.”

그 순간 내 혈압이 콱 올랐다. 특히 ‘골이 비었다’는 말 때문이었다. 그래서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행 13:46)로 단정하고 지체 없이 나왔다. 운전석에 앉아 한동안 씩씩거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잘못은 내게 있었다. 식당이면 커피 한 잔이라도 주문하고 전도를 했어야 했는데…. 그래서 ‘골 빈 전도사’ 소리가 나온 것 아닌가. 그런데 어디선가 이런 음성이 들려왔다. “그럼 네가 네 골 가지고 개척교회 하고 있니? 너는 ‘알곡 목회자’가 되겠다고 했잖아?”

시골 예배당에 처음 간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런데 몇 주 뒤 부흥성회가 있어 첫날 저녁집회에 갔었다. 십자가 아래에 “알곡이냐, 쭉정이냐”라는 주제가 붙어 있었다. 그 순간, ‘아하, 예수 믿으면 알곡이 되어야 하는 거로구나’ 그런 감동이 머리에서 심장으로 쭉 흘러내렸다. 그래서 무릎 꿇고 ‘알곡 예수쟁이’가 되겠다고 하나님께 단단히 약속했다.  집회를 통해 그것이 성경말씀인 걸 알았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니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2)는 말씀은 쉽게 이해되었다.

그 때부터 이 ‘알곡 말씀’은 내 마음 밭에 떨어진 좋은 씨앗이 되었다. 산에 올라가서 가끔 ‘나는 알곡이다’ 하고 소리를 질러대기도 했다. 그리고 알곡아들 결심을 시작으로 알곡학생, 알곡신자, 알곡반사, 알곡성가대원, 알곡청년회장, 알곡집사, 알곡장로, 알곡군인, 알곡남편, 알곡애비, 알곡신문기자, 알곡전도사, 알곡목사, 알곡설교자, 알곡교수, 알곡부흥사, 알곡총장, 알곡총무, 알곡총회장, 알곡원로목사, 알곡작사자, 알곡글쟁이, 알곡시민…. 그런 결단으로 여기까지 걸어 왔다.

성경과 신학을 연구하면서 ‘알곡 말씀’을 더 깊고 넓게 깨달아 갔다. 특히 예수님 자신이 ‘내가 곧 알곡이니라’라는 결단을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요 12:24)로 밝히신 것, 이것을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요일 5:12)와 합류하여 풀면 알곡의 ‘알’은 바로 ‘살아계신 예수님’을 뜻했다. 한 가지, 헬라어성경에는 ‘그의 알곡’(마3:12), ‘그의 곳간’(눅 3:17)인데도 한국어 역에는 그것이 통째로 무시되어 지금도 안타깝다.

이 ‘알곡 말씀’에서 성결교회가 구원론 중심의 신학적 기초를 튼튼히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을 때 큰 기쁨이 있었다. 하나님 창고에 들어갈 그분의 알곡이 되려면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혹은 성령께서 인격 안에 충만하게 내주하셔야 한다. 바로 거듭남과 성결화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온전지향의 과정이다.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닮아가는 삶이기에 유니온교회 최고사명을 “예수님처럼, 꼭 예수님처럼”이라 선언했고, 함생목회론과 함생신학도 그것에 기초했다. 예수님의 골과 심장을 품고 ‘신학 있는 목회, 목회 있는 신학’에 땀흘린 열매일까, 미주에서는 ‘건강한 목회자, 건강한 교회’의 모범사례라는 평가를 가끔 듣는다.

하지만 내적 고민도 많았다. ‘네가 정말 알곡이야?,’ ‘이 놈아, 알곡이라면서 그 정도밖에 못 해?’ ‘쭉정이 치고도 상 쭉정이인데….’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하늘의 소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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