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후 2:8~13)
사람은 너나할 것 없이 크고 작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가장 두렵습니까? 실패에 대한 두려움, 질병에 대한 두려움, 관계에 대한 두려움 등. 그러나 그 어떤 두려움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크지는 않을 것입니다. 죄와 죽음은 우리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문제요, 이보다 더 심각하거나 더 우선적인 문제는 없습니다.
죽음은 모두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견된 죽음이 있지요. 불치의 병에 걸려 다가오는 죽음을 서서히 맞으며 죽음에 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죽음을 맞게 되는 사람들도 있지요. 지금도 생각만 해도 끔찍한 진도 앞바다의 여객선 침몰사건과 같은 죽음입니다. 그 누가 그들의 죽음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제가 아는 분의 친구는 아주 건강하고 운동도 많이 해서 언제나 건강에 자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배드민턴을 치고 스트레칭을 하기 위해 기지개를 펴다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무도 내일 일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교인 중에 세상을 떠나면 장례를 위해 승화원을 자주 가게 됩니다. 얼마 전 화장 순서를 기다리며 대기실에서 마지막 예배를 드리려는데 먼저 자리를 잡은 다른 유족 중 한 여인이 관을 붙잡고 아주 서럽게 대성통곡을 합니다. “아이고, 아이고,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불쌍한 것. 불쌍한 것. 이제 영원히 헤어져야 하는구나. 아이고 아이고.” 통곡이 멈추길 기다리다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우리 교우들이 유족들과 함께 찬송을 시작했습니다. “천국에서 만나봐요 그날 아침 거기서 … 만나봐요 만나봐요 그날 아침 그곳에서 만나요.”
얼마나 대조적인가요? 그 여인에게 이 천국의 소망, 부활의 소망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함께 한 모든 성도들이 더욱 크게 찬송을 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정한 디모데후서 2장 8절 말씀입니다.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사도 바울이 외치는 ‘내가 전한 복음! 나의 복음!’이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8).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게베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3~8). 사도 바울의 고백들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부활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재미있는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마 28:11~13). 그렇게도 당당했던 대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안절부절합니다. 예수의 부활이 허구임을 증명하기 위해 예수의 시신을 만천하에 공개하면 그만인데 말입니다.
그와 반대로,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 사건 앞에 벌벌 떨고 있던 제자들, 심지어 자신들의 스승이신 예수를 부인하고 배신하며 도망쳤던 제자들이 두 달도 채 못 되어 다시 역사에 등장합니다. 이제는 아주 당당하게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목숨을 내걸고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외치는 복음의 핵심은 “너희가 죽인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다!”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용기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하다가 한결같이 순교를 합니다. 복음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았던 거지요.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고, 안드레도 십자가에서 순교,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는 칼에 목베임을 당해 순교, 빌립도 십자가에, 바돌로매도 십자가에, 도마는 창에 찔려 순교, 마태도 목베임을 당해 순교, 알패오의 아들 야보고는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뜨려져 순교, 그리고 전해오는 이야기는 가룟유다를 대신해서 사도로 뽑혔던 맛디아도 돌에 맞아 순교했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다가 말입니다.
부활은 기독교에만 있습니다.
성탄절에 시내 한복판에 내려와 있는 어느 불교 사찰에 현수막이 크게 내걸렸습니다. ‘경축 예수 탄생하셨다’ 그것을 보는 순간 당황스러웠습니다. 절간에 예수 탄생 현수막이라니! 마치 불교가 타종교에 대해 포용력과 관용의 마음이 있다는 듯 과장홍보 내지 과시를 하는 것이리라 여겨졌습니다. 불교가 기독교를 참 많이 따라합니다. 찬송가를 모방하여 찬불가를 만들고, 여름성경학교를 본 따서 여름불교학교를 여는 등 많은 것을 따라서 하지요. 그러나 절대로 따라할 수도 없고, 성탄절처럼 현수막을 밖에 내걸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불교에서 ‘경축 예수 부활하셨다’라고 현수막을 내걸 수 있을까요?
옥스퍼드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였던 토마스 아놀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는 수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았다. 다른 사람보다 나 자신을 위해 확실한 답을 얻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 결과 기적의 사건인 예수의 부활보다 더 완벽하게 증명할 수 있는 사실(史實, historical fact)은 인류 역사상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만큼 사료가 많은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영국의 위대한 설교자였던 스펄전 목사님이 하루는 새장 속의 새를 괴롭히는 불량소년을 보았습니다. ‘새를 어떻게 할거니?’ 스펄전 목사님이 묻자 소년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괴롭히다가 죽일거예요.’ 목사님은 돈을 주고 그 새를 사서 멀리 날려 보냅니다. 며칠 후 부활주일, 스펄전 목사님은 이렇게 설교합니다. “마귀는 인간을 괴롭히다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내주는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요, 부활의 역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삽시다.
나는, 우리는 어떤 존재일까요? 하나님의 아드님이 오셔서 나를 위해 죽으셔야 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도저히 구원받지 못할 인생입니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아드님이 나를 위해 죽으실 만큼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고 존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얻었도다”(사 53:5).
사랑하는 성도님!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또한 주님과 함께 왕노릇할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5:55, 57).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요 6:40).
우리 주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