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도시서 새 희망의 나래 펼쳐
재개발·철거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 신뢰하며 꿋꿋이 교회 지켜
종교부지 선정돼 지방회·교회 후원으로 매입 … 교회 건축만 남아

인천시 중구 운북동에 위치한 금산교회(조경수 목사)는 개척 당시만 해도 배를 타야 들어갈 수 있던 섬마을 교회였다. 목회환경도 열악해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2004년 신공항 건설 등 재개발 열풍으로 폐쇄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금산교회 조경수 목사와 성도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우여곡절 끝에 영종도 신도시에 종교부지를 매입했다. 이들은 지금 하늘신도시에서 비상을 위해 부흥의 날개를 힘차게 펼치고 있다.

영종도, 그곳은 광야였다
1997년 조경수 목사가 부임할 당시 영종도는 말 그대로 광야였다. 행정구역상으로 인천시였지만 도시가스는커녕 기름으로 난방을 하는 집은 5가구 중 한 가정밖에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산에서 땔감을 해와 아궁이에 불을 땠다.

조 목사는 “2004년 재개발이 시작될 때까지 운북동은 시골보다 못한 환경이었다”며 “영종대교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배를 타고 시내에 나가야 할 정도로 열악했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인구의 대부분이 노년층으로 농사를 지어 근근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교회는 더 힘든 상황이었다. 비가 오면 물이 새고 천장에는 쥐가 돌아다녔다. 이런 환경 때문에 사역자들의 임기도 길지 않았다. 1989년 창립한 금산교회는 2~3년에 한 번씩 목회자가 바뀌는 ‘정거장’ 교회로 유명했다.

무엇보다 절망적이었던 것은 목회자를 바라보는 교인들과 주민들의 불신이었다. 처음 부임 당시 성도들과 주민들은 조 목사에게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조 목사도 얼마지나지 않아 언제든지 떠날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조경수 목사는 “언제 떠날지 모르는 목회자에게 교인들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며 “열악한 환경과 메마른 영적 상태는 말 그대로 광야였다”고 회고했다.

43개월 만에 마음을 열다
조 목사는 이곳이 나에게 허락된 사역지라는 믿음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명령하실 때까지 금산교회를 섬기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부임 후 조 목사가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차량봉사와 이웃 섬김이었다. 당시 운북동은 대중교통이 발달되지 않아 이동에 어려움이 있었다. 버스가 2시간에 한 번씩 다녔고 초등학생들은 50분씩 걸어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조 목사는 이른 아침 집집마다 방문해서 학생들을 태워 학교에 데려다주는 일부터 시작했다. 교인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매일 아침 차량을 운행했다. 또한 노인들 중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도 병원에 모셔다 드리는 등 꿋꿋이 섬겼다.

뿐만 아니라 틈틈이 땔감을 주워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가정에 갖다주고 농사철에는 직접 농사일도 도왔다.
그러나 이런 헌신에도 주민들은 좀처럼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자꾸 떠나는 교회 목사에 대한 믿음이 적고, 섬 지역의 특성상 미신이 많고 목회자의 호의를 곱게 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 목사는 변함없이 섬김을 계속했다. 당시 매달 차량 주유비로만 80만 원을 넘게 쓸 정도로 조 목사는 열심히 차량봉사에 주력했다. 이런 조 목사의 섬김에 주민들이 마음의 문을 연 것은 부임 후 4년 만이었다. 교회 앞을 지나가던 불신자가 조 목사에게 다가와 감을 하나 주고 간 것이다. 조 목사는 “교인이 아닌 사람이 교회에 찾아온 것은 정확히 43개월 만이었다”며 “감을 받는 순간 이제 마음을 주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 조경수 목사 부부
재개발 속에 찾아온 위기
이후 금산교회는 더디지만 조금씩 부흥했다. 교회 앞마당에서 행사를 할 때면 주민들도 조금씩 찾아왔고 교인 수도 20여 명으로 늘어났다.

다른 교회에 비해 여전히 열악했지만 교인들은 열심히 교회를 섬겼고 주민들도 점차 금산교회에 호감을 보였다. 그러나 2004년 운북동 지역에 재개발 바람이 불면서 교회는 위기를 맞게 된다. 농사를 짓던 땅이 재개발 지역으로 선정되면서 주민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보상금이 적어서 인천이나 신도시로 갈 수 없는 형편이라 교인들은 이천과 광주 등 먼 곳으로 떠났고 나름 북적이던 교회에 조 목사 가정과 몇몇 교인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설상가상 교회도 재개발 지역에 포함되어 철거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조 목사는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작은 교회였지만 지역을 지켜왔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피값으로 세워진 교회를 세상의 개발논리 때문에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적같은 종교용지 선정
그러나 이후로도 교인들과 주민들 대부분이 운북동을 떠나갔고 금산교회만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모두 떠난 상황에서 교회를 지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재개발을 담당했던 시공사는 전기와 가스, 물을 끊었고 교회 주변의 모든 길을 파헤쳐 사람들이 다닐 수 없게 했다.

그럼에도 조 목사가 끝까지 교회를 지키자 나중에는 용역을 보내 압박하기 시작했다. 용역들은 매일 교회 앞에 찾아와 술판을 벌이며 조 목사의 험담을 했다. 욕설은 물론이고 술병과 담배꽁초를 교회에 던지며 압박했다.

상황이 이쯤되자 주변에서도 조 목사를 만류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헌신적으로 목회를 했으니 이제는 다른 교회로 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이었다. 실제로 몇몇 교회에서 담임청빙 제안도 있었다. 그러나 조 목사는 “목자가 양을 두고 떠날 수 있겠냐”며 끝까지 교회를 지켰다. 그는 “마지막에 한 명도 남지 않으면 하나님의 명령으로 알고 떠나려고 했지만 끝까지 함께 하는 성도들이 있어 그렇게 하지 못했다”며 “당시에는 내가 하나님께 서원하고 약속했던 것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매일 이런 상황이 반복되던 중 금산교회에 희망의 소식이 들려왔다. 새로 개발되는 미단지구에 배정된 종교부지 두 곳 중 한 곳에 선정된 것이다. 규모는 661.1m²(200평)으로 교회를 세우기에 적당한 크기였다.

당시 주변 사람들은 모두 기적같은 일이라고 했다. 금산교회 같이 작은교회가 종교부지를 받는것 자체가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조 목사와 교인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교회를 향한 순수한 열정과 마음을 하나님께서 알아주셨다고 생각한 것이다.

▲ 금산교회 종교부지
새 희망을 노래하다
종교부지에 선정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금산교회는 또 다른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종교부지를 계약하기 위해 필요한 7억 5000만 원은 금산교회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금액이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인지 금산교회의 종교부지 선정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연락이 온 곳은 이단사이비 단체였다.

이들은 컨설팅 업체를 통해 조경수 목사에게 협상을 요구했다. 어차피 금산교회가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기 때문에 자기들에게 넘기면 비싼 돈으로 매입하겠다고 했다. 종교부지의 원래 가격에 프리미엄을 붙여서 땅 값은 천정부지로 오르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12억 원까지 치솟았다.

교인 중 일부는 이단사이비가 아닌 전통교회에 종교부지를 팔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목사님이 지금까지 고생하면서 사역한 것을 잘 아니깐 종교부지를 팔아 신도시에 상가를 얻고 사택도 얻어 편하게 목회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조 목사는 교인들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종교부지를 허락하신 것은 내가 편하게 목회하라는 뜻이 아닌 금산교회를 계속 이어가길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며 “금산교회를 끝까지 지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후 종교부지는 기적적으로 5억 원까지 내려갔고 지방회와 주변 교회들의 지원으로 지난 1월 계약금을 지불했다. 이제는 교회 건축만을 남겨놓은 상황이다. 조경수 목사는 “모든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포기하라고 할 때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여기까지 왔다”며 “고난의 끝에 행복이 있다는 마음으로 앞으로도 새 희망을 노래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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