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바둑경기는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이었다. 왜 사람들은 일개 로봇과의 경기에 관심을 가졌을까?  이세돌이 알파고에게 패할 때 사람들은 경악했다. 사람들은 충격과 실망 속에 빠졌다가 이세돌 9단이 3전4기하자 인간승리라고 외쳤다. 좌절했다가 흥분하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승부욕 때문이다.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남에게 지는 자신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 이전에도 인간은 기계에게 패한 적이 여러 번 있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을 반역한 과거는 잊어버리고 자기가 만든 인공지능이 자신을 반역할까봐 노심초사한다.

인간의 위대함을 찾기 위해 인공지능과 비교한다는 것은 대인의 모습이 아니다. 자신이 만든 작품과 자신을 비교하는 소인의 모습을 버려야 한다. 오히려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찾으려고 해야 한다.

져주시는 하나님의 한 수에서 인간은 한 수를 배워야 한다. 완벽하고, 힘이 세고, 우월한 모습이 아니라 져주고, 약해지는 모습이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모습이다. 이 모습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이다.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것이 져주는 것이다. KBS 해설자 박정상 9단이 말했듯이 알파고는 ‘전투형’이다. 그는 알파고가 전투에 강하고, 상대방이 무리했을 때 응징하는 능력이 강하다고 분석했다.

이세돌 9단은 3전4기하고 알파고의 약점중의 하나가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경우 대처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알파고는 승리를 위해 프로그램화되었다. 승리를 위한 계산이 나오지 않을 경우 대처 능력이 떨어진다. 알파고는 패할 때 대처하는 능력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약해질 줄 알고, 패할 줄 안다. 남을 위해 져준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져준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힘을 뺀 상태에서 어떻게 해야 할 줄 알기 때문이다. 힘을 빼고 약한 사람들과 함께 할 줄 알기 때문이다. 

알파고와 비교하여 인간의 모습을 찾으려는 소인의 행태를 버리고 인간의 모범이 되신 예수님에게서 인간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 인공지능을 이기려고만 생각하지 말고, 인공지능과 어떻게 더불어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방인이 오면 어떻게 더불어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지 않고, 이겨서 그들보다 우월해지거나 그들을 배척하려고만 하는 자세를 과거에 보여 왔다. 새터민들, 성소수자들, 외국인 노동자들을 배척하였다. 예수님은 어린이와 과부, 이방인을 환대하셨다. 예수님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이 바로 어떻게 이방인, 로봇과 더불어 살지를 생각하려는 자세이다. 

아들이 3살이었을 때다. 화가 나서 말도 안하고 방에 누워있는데 아들이 와서 “아빠 일어나”라고 말했다. 그래도 내가 누워서 꿈쩍하지 않자 아들은 노래를 불렀다. “아빠, 힘내세요. 기운이가 있잖아요.” 이 때 나는 “이 녀석도 사람이구나!”하고 말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 사람이 사람답다고 말하는가? 서울대를 들어갈 때가 아니다. 천재가 될 때가 아니다. 오히려 주위에 사람들을 돌아볼 줄 알고 더불어 살려고 할 때 사람답다고 말한다.

이기려고만 하는 세상에서 사순절에 고난주일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의 행적을 생각한다. 십자가에서 완전히 천대받으면서 낮은 자가 되었다.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세상에 져주셨다. 패배자가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얻었다. 져주시므로 사람들을 구원했다. 사람이 사람다워진다는 것은 승리, 완벽에 있지 않고, 져주고 나눠주되 아낌없이 주는 예수님을 닮을 때이다. 알파고는 예수님을 닮을 수가 없다.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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