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선구자들, 잠든 유럽의 지성 일깨워

페라라 에스테성 앞 사보나롤라 동상

보름스에서 만난 '종교개혁 기념상'
보름스의 종교개혁 기념상을 찾았다. 루터는 성경을 들고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 내가 서 있습니다. 나는 다른 것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이라는 글은 보름스 의회에서 신념을 밝히는 루터의 말이다.

보름스의 종교개혁 기념상을 찾았다. 루터는 성경을 들고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 내가 서 있습니다. 나는 다른 것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이라는 글은 보름스 의회에서 신념을 밝히는 루터의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 이곳을 찾은 이유는 루터 때문이 아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4명, 종교개혁의 선구자 4인, 발도, 위클리프, 후스, 사보나롤라 때문이다. 프랑스, 영국, 체코, 이탈리아 출신으로 나라도 다르고 시대도 다르며 평신도 전도자, 인문학 및 성서학자, 교육자 및 설교가, 수도사 및 정치가 등 활동도 달랐다. 하지만 그들 모두 중세교회를 강력히 비판했고 성서말씀을 자국어로 번역해 가르쳤으며, 개혁의 새 시대를 열었던 인물들이다.

이들 중 두건을 눌러쓴 수도사 복장의 사보나롤라에 시선을 집중했다. 한 손은 가슴에, 다른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강력한 눈빛과 굳게 다문 입술이 비장하다. 왜 이런 모습일까? 역사는 왜 그를 종교개혁 선구자로 평가할까? 의문을 품은 채 그가 태어난 페라라와 수도사가 된 볼로냐, 그리고 그가 활동한 피렌체로 발걸음을 옮겼다.

페라라에서 사보나롤라를 만나다
페라라는 이탈리아 중북부의 도시로 사보나롤라가 태어나서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사보나롤라는 처음에는 유명한 의사인 할아버지를 뒤이어 교양과정 학위 후 의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23세 때 볼로냐에 있는 도미니크 수도원으로 들어간다. 그가 아버지에게 썼다는 편지는 이렇다. “나는 사악함에 눈 먼 백성들을 더 이상 보고 참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덕이 도처에서 경멸되고 악이 추앙되며 경외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타락의 시대 현실을 안타까워했고 수도사가 되어 그것을 고치려 한 것이다.

에스테 성 앞 광장에 서 있는 그의 동상을 찾았다. 보름스와 다른 점은 페라라 동상은 서서 외치고 있다는 점이다. 부릅뜬 눈과 치켜든 손은 시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모습이다. 동상 전면부에 “부패한 시대에 악과 폭군에게 징계를 행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예언자로, 정치지도자로 타락했던 시대를 바로 잡으려 했던 활동을 함축한 말이다. 그가 거닐었을 옛 길과 수도사가 되기 전까지 기도드렸을 페라라 대성당을 둘러봤다. 그리고 사보나롤라가 분개했던 당시 시대상과 오늘의 시대를 비교해본다. '사악함에 눈 먼 백성, 덕이 경멸당하고 악이 추앙되는 시대'는 오늘도 다르지 않는 것 같다.

볼로냐, 도미니크 예배당을 찾다
사보나롤라는 1088년 유럽 최초로 대학이 설립된 곳, 800년 전인 1216년 도미니크수도회가 첫 총회를 개최한 볼로냐의 수도원에 들어간다. 그가 찾은 곳은 ‘산 도미니크 예배당 및 수도원'일 것이다. 이곳은 수도회의 창립자인 도미니크의 무덤이 있고, 현재도 수도원이 있는 수도회의 중심지다. 이곳에서 수도사로서 말씀과 신앙, 경건의 훈련을 받았다.

순백색의 예배당 내부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 때문인 듯 매우 밝았다. 또한 하얀 옷(도미니크 수도사들은 하얀 옷에 두건 달린 망토를 입는다)을 입은 수도사와 순백색의 예배당, 소예배실에 안치된 도미니크의 하얀색 석관은 묘한 일치감을 드러냈다.

예배당 정면 옆문을 통해 중앙 제대 뒤편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작은 탁자와 수도사들이 앉는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수도사들이 매일 이곳에서 예배드리고 중요한 회의를 하는 것 같다. 제대 옆의 문을 통해 수도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수도원의 공기를 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볼로냐에서도 사보나롤라의 흔적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수도사로 4년을 포함해 그는 6년 동안만 이곳에서 머물렀기 때문이다.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에 서다
사보나롤라가 자신의 열정을 불태운 곳은 피렌체이다. 산 마르코 수도원의 강사가 된 사보나롤라는 높은 학식과 금욕생활로 명성을 얻었고 나중에는 수도원 원장이 된다. 그는 “교회는 개혁이 필요하며 벌을 받은 다음에 쇄신될 것"이라고 주장했고 피렌체 정부의 폭정과 함께 도덕적 부패로 인해 도시가 멸망한다고 경고했다.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
그가 죽기 전까지 머물렀던 성 마르크 수도원을 향했다. 예배당 안에서 의자에 앉은 사보나롤라를 다시 만났다. 두건을 썼지만 그는 다소 나이든 모습으로 시선은 아래쪽을 향하고 있었다. 선포자보다 어떻게 수도사를 훈련시킬지 고민하는 수도원 원장이었다. 이곳 예배당에서 그는 아모스, 에스겔, 룻기, 미가, 출애굽기 등을 설교했다. 강력한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기 위해 강단 앞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그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열정적인 선포 이면에 신앙과 시대를 향한 고뇌를 간직했음직한 모습에 머리가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성당을 나와 과거 수도사들이 살던 수도사의 방을 찾았다. 목조 구조를 갖춘 복도 천정과 43개의 작은 방에는 작은 창문과 성화가 그려진 벽이 전부였다. 너무도 검소했다. 방 끝 막다른 곳에 사보나롤라의 방이 있었다. 작은 방에는 그의 상반신 상, 수도사들이 사용했던 책상, 그를 기념하는 그림, 그리고 기도할 때 사용했음직한 묵주와 입었던 옷이 놓여있었다. 전시물은 과하지 않았고 작은 방과 조화를 이뤘다.

그는 이곳에서 수도사들의 교육과 피렌체 시민들에게 선포할 말씀을 묵상하고 기록했을 것이다. 오늘날 작은 수도사의 방이 한국 개신교에 필요하지 않을까? 일정기간 목회자 재교육을 수도원과 같은 곳에서, 금욕과 성서 필사와 통독, 침묵과 기도 등으로 실시하면 어떨까? 한국교회에 새 바람이 불지 않을까? 갑자가 사보나롤라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 했다.

피렌체, 대성당과 시뇨리아 광장에 멈추다
성 마르코 수도원을 나서 산타 마리아 대성당을 향해 걸었다. 청중이 많은 경우 사보나롤라는 이 길을 시민과 함께 걸었고 대성당에서 설교했다. “이탈리아와 피렌체의 부패를 씻기 위해 신의 칼이 곧 내려올 것"이라는 경고와 중세교회 비판은 중세교회의 미움을 받기에 충분했다. 교황은 로마를 방문해 직접 예언해 줄 것도 부탁하고 추기경이 되어 자신에게 권면해 줄 것을 제안하는 등 그를 자제시키려 했다. 하지만 사보나롤라는 이를 거부한다. 침묵보다는 외침을 택한 것이다.

사보나롤라는 시민들의 지지 속에 도시의 최고 지도자로 4년간 일한다. 이 때 그는 피렌체에 이탈리아와 교회를 개혁할 그리스도교 공화국, 즉 하나님 나라를 세우길 원했다. 강력한 도덕적인 법률을 제정하고, 사순절 때는 개인 장신구, 음란한 그림, 카드, 도박용 탁자 등을 불태우는 ‘허영의 화형식'을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중세교회와 반대 세력의 공격으로 인해 수도원에서 강제로 끌려나와 고문당했고 자신이 화형식을 진행했던 그곳에서 교수형 후 화형에 처해졌다.

그가 일했던 피렌체공화국 청사 베끼오 궁전과 허영의 화영식이 진행된 광장, 그가 죽임 당한 터를 찾았다. 광장 한 곁에는 “1498년 5월 23일, 이곳에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도메니코 및 실베스트로와 함께, 부당한 판결로 교수형을 받은 뒤 화형에 처해졌다"는 글이 쓰인 기념비가 바닥에 박혀 있었다.

비를 피하기 위해 수도자처럼 두건을 쓴 채 비에 젖은 기념비를 쓰다듬었다. 문득 그가 올려봤을 하늘이 궁금해져 두건을 벗고 하늘로 눈길을 돌렸다. 잿빛 하늘, 그는 한 줌 재가 되어 땅과 하늘, 강물에 흩뿌려졌다. 그러나 하늘은 불길 속에서 죽임을 당한 그를 불러갔지만 20년 후 루터를 통해 더 큰 형태의 불길, 종교개혁의 불길로 소생했다.  

보름스의 종교개혁 기념물

종교개혁의 선구자 4인 발도, 위클리프, 후스, 사보나롤라
 종교개혁 선구자 중 첫 인물은 프랑스의 발도다. 부유한 상인 출신인 그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길거리 복음전도자가 됐다. 교부들의 문서, 성서를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했고 남부 독일과 보헤미아에 등지에서 복음을 전했다.

발도 위클리프 후스 사보나롤라

그가 1170년 조직한 단체가 ‘리용의 빈자'로 불리는 발도파다. 하지만 발도파는 중세교회로부터 배척을 받았고, 로마교회는 1229년에는 평신도가 성경 읽는 것을 금지했다. 보름스 동상의 발도는 펼쳐진 성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누군가를 응시하고 있다. 그의 손에는 지팡이가 들려 있고 두건이 달린 옷과 가죽신은 먼 거리를 다니는 설교자 모습이다.

위클리프는 종교개혁의 샛별로 불린다. 보름스의 그는 지팡이를 가슴에 안고 성서를 펼쳐 묵상하는 모습이다. 노학자의 모습에서 옥스퍼드, 캔터베리, 발리올 대학의 교수요, 학장이었던 그를 느낀다. 그는 “성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최고의 권위이며 신앙의 기준”이라고 강조했고, 평신도의 성경 소지, 읽을 권리를 주장했다. 또 라틴어 성경을 최초로 영어로 번역, 출간했다.

그는 영국 편에서 교황권에 대항했는데 “교황은 사기꾼이며 교만한 로마의 사제”라고 비판했다. 죽음 후 이단으로 정죄되고 유골은 불태워 강에 뿌려졌다. 하지만 누군가의 말처럼 “그리하여 위클리프의 재는 전 세계로 번졌다”. 그를 따르던 롤라드파는 탄압 받았고 후에 영국 개신교 성립에 기여했다.

위클리프의 사상은 보헤미아에도 전해졌고 프라하대학교 교수, 학장인 후스에 의해 꽃피웠다. 후스는 시민을 위한 베들레헴채플 설교자가 되었고 체코어 설교와 찬송으로 사람들의 민족적 열망을 일깨웠다. 그는 세속 권세와 보화에 관심을 두는 교황과 주교를 비판했다가 설교금지와 로마 소환 통보, 파문을 당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밝히기 위해 참석했던 공의회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화형됐다.

기념상의 후스는 설교자가 입은 중백의를 입고 십자가를 두 손으로 붙잡고 응시하는 모습이다. 오직 십자가와 예수만 생각하면서 말씀을 전했던 그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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