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삭

어느 목회자님께서 성경을 굳이 원어로 읽을 필요가 있느냐 하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물론 예전보다는 번역성경이 많이 나와 있어서 훨씬 더 성경을 다각도로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쓰여진 본래의 언어로 읽는 것은 마치 흑백 텔레비전을 보다가 칼라 텔레비전으로 보는 듯한 묘미를 느끼게 합니다. 특히 매주일 설교를 해야 하는 목회자들에게는 특별한 영감을 얻게 합니다.

이를테면 창세기 22장 5절은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현재의 개역한글성경 이전에 사용되던 개역한글성경에서는 이 구절이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히. 니쉬타하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히.베나슈바)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무심코 지나갈 수 있는 이 구절을 원어로 읽어보면 매우 의미 있는 내용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경배하고’(히. 니쉬타하베)라고 하는 말은 본래 ‘우리가 경배하고’ 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돌아오리라’ (히. 베나슈바)고 한 부분을 직역 하면 ‘그리고 우리가 돌아오리라’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이 본문이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성경에서는 (창 22:5)“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히. 니쉬타하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히.베나슈바) 하고”라고 정확하게 번역을 하였습니다. ‘우리가’라고 하는 말의 유무가 무슨 큰 차이가 있느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돌아오리라”에서 ‘우리가’가 있는 해석과 ‘우리가’를 빼 놓고 하는 해석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독자였던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물로 드리기 위해 가라고 하는 하나님 명령은 말 그대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인생 최대의 딜레마였습니다. 이러한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한 위대한 믿음이 요구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그의 아들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드린다고 하여도 이삭은 반드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종들에게 지금 하나님께 이삭을 데리고 가서 번제물로 드린다고 하여도 “우리가 돌아올 것이다”라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을 히브리서는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히 11:19) “그가(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라고 말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여도 우선 순종하기로 결단하면 그 때부터 이미 기적은 시작됩니다. 믿음은 순종할 때 생기는 것이지 고민한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믿었고, 그 믿음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처음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순종하기로 결단하고 몸을 움직여 3일 동안 모리아 산으로 오는 동안 싹이 튼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시면 전진할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진하면 길을 열어 주십니다. 이삭을 칼로 찌르려는 순간 하나님이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그냥 찌르는 척 한 것이 아니라, 이미 마음속으로는 이삭을 죽인 것이라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향하여 “이제야 내가 아노라”(히. 야다아) 하는 말은 하나님의 테스트를 거친 이에게 주신 믿음의 인정입니다. 희생이 없는 순종은 순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만의 이삭을 완전히 내려 놓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 믿는 맛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