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때 이런 말씀 (사순절 묵상)

사순절 기간이다. 광야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현대 기독인은 사순절 기간만이라도 말씀을 묵상하며 경건한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응답해야 한다. 사순절 하나님 안에 고요히 머물기 위해, 일상 속에서 깨어서 꾸준히 말씀을 읽으면서 사순절의 울림을 느껴보자. 사순절의 절정인 고난 주간에 초대교회는 마가복음 11장부터 끝까지를 매일 한 장씩 읽었다. 그 이유는 마가복음이 특별히 예수의 고난을 중심으로 먼저 기록된 후에 예수의 나머지 말씀과 사역들을 추가하여 기록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을 통해 이제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을 한 흐름으로 돌아보자.

마지막 첫째날(일요일) : 막 11:1~11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은 먼저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첫째 날(11:1)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예수에게 예루살렘은 어떤 곳인가? 그곳은 마가복음에서 3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8:31; 9:31; 10:33~34)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음을 당하며(8:31),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 하고 죽일 것(10:34)”으로 예언된 곳이다. 자기가 죽어야 하는 그 곳, 누구나 피하고 싶은 그 자리이다.

예수님은 작은 나귀새끼에 겸손히 오르시어 나뭇가지를 꺾어 환호하는 군중들을 맞으신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호산나!” 그렇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는 성전에 들어가 모든 것을 둘러보신 후 12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을 나와 그 옆의 가난하고 척박한 작은 동네 베다니로 향하신다.(11:11)
    
마지막 둘째날(월요일) : 막 11:12~19 
날이 밝았다.(11:12). 베다니에서 나온 예수는 배가 고팠다. 가난한 마을이라 10여 명이 넘는 청·장년의 아침 요기를 대접할 집도 없었던 것일까? 시장한 예수는 가난한 자가 길거리에서 배고픔을 달래는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찾아보았다. 그 부드럽고 달콤한 맛은 잠깐이나마 허기를 달래주는 반가운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때가 되지 않아 열매를 찾을 수 없었다.(11:13)

예수는 그 나무를 저주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11:14) 하나의 상징이었을까? 이스라엘이라는 무화과나무에는 열매가 없고, 그들의 삶과 종교의 중심인 성전에는 거짓된 경건과 위선이 가득했다. 예수는 또 성전을 저주할 수밖에 없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 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11:17) 날이 저물어 그들은 다시 성을 나서고 이렇게 그 분의 마지막 이틀이 어느새 지나간다.(11:19)

마지막 셋째 날(화요일):막 11:20~13:36
아침에 예수를 모시고 다른 제자들과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베드로는 뿌리째 마른 무화과나무를 본다.(11:20) 성전을 중심으로 한 지도자들은 어제 성전에서 소요를 일으킨 젊은이를 시험한다. “너의 권위는 어디서 온 것이냐?” 예수는 비유와 말씀으로 그들의 오만과 위선을 고발하며 그 위에 쌓아올려진 성전의 몰락을 예언한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13:2) 하나님이 떠나 없는 하나님의 집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지 못할 때, 그 때에는 무슨 일이 생길까?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며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다”(13:8)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13:31),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13:33)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13:36) 깨어 있으라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13:37) 깨어있으라! 깨어있으라! 깨어 있으라! 반복되는 그 분의 음성이 귓가에 들려온다.

마지막 넷째 날(수요일):막 14:1~11
이제 이틀만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 되는데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무시하고 백성들 앞에 고발한 예수를 잡으려고 흉계를 꾸민다.(14:1) 이 날 예수는 베다니에서 시간을 보낸다. 나병환자 시몬은 예수와 제자들을 불러 식사를 대접한다. 무슨 고마운 일이 있었을까? 저주받은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가난한 사람이 잔치를 베풀다니, 예수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도 그럴 것이 그 자리에는 또 어떤 여인이 삼백 데나리온도 넘는 향유를 가져다 예수의 머리에 붓는 일이 발생한다.

한 데나리온이 일용직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면 삼백 데나리온은 한 노동자가 일 년을 아무것도 먹지 않고 고스란히 모아야 되는 돈이다. 그러나 그 향기가 진동하는 꿈 속 같은 그곳에서도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14:4) 그리고 그 일은 제자 중의 하나인 가룟유다를 실족하게 하여 예수를 배반하게 한다. 예수는 참 친구가 있던 분인가? 그 분에게는 장례조차도 호사스러운 일이며 사람의 마음에 걸림돌이 되는 일인가?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14:8)
 
마지막 다섯째 날(목요일): 막14:12~72
드디어 무교절의 첫날 곧 양 잡는 날이 되었다.(14:12) 오늘은 참으로 길고 긴 하루이다. 예수는 관례대로 자신을 따랐던 제자들과 명절을 보내신다. 그 날 밤 예수께서는 유월절 무교병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또 잔을 그들에게 주시며 그들이 다 마시기를 기다린 후에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행하며 지금도 그 밤을 기억한다. 제자들은 그의 몸과 그의 피를 먹고 마셨음에도, 그래서 예수와 한 몸이 되었음에도 심지어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그러지 않겠습니다”라고 고백하고 다짐했음에도 예수를 버린다.

그래서 겟세마네에서 행한 그 분의 기도는 너무 처절하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 이어서 겟세마네에서의 그 비굴함과 비겁함, 우리의 민낯이 그대로 노출된다. 예수가 체포당하는 그 순간 누구도 예외 없이 예수를 버리고 외면한다.(14:50) 그 현장에서는 최고급 신도나(sindo,na)로 지은 옷이 벗겨져 알몸이 되어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14:51) 그렇게 그를 부인하고, 저주하며 떠나보낸 밤 우리는 통곡하며 울 수밖에 없고, 닭 울음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다.(14:72)       

마지막 여섯째 날(금요일): 막 15:1~47
예수의 마지막 금요일, 유대의 가장 큰 명절날 이른 새벽부터 유대의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 장로들, 서기관들, 그리고 온 공회는 예수를 이방인 빌라도에게 넘겨준다.(15:1) 빌라도가 그렇게 방면하고자 한 예수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군중들의 소리에 묻혀버린다.(15:13)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15:34) 이제 그의 버림은 우리의 구원이 되었고, 그의 죽음이 우리의 삶이 되었고, 그의 실패는 우리의 승리가 되었다. 그의 사형을 집행하던 로마의 켄투리오는 마침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고 고백한다.(15:39)

이제 그 분의 마지막 일주일이 끝났다. 하늘로부터 났던 한 소리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가 이방인의 입을 통해 이 땅에 임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이제 우리도 입을 모아본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신 예수께 영광!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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