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모 대학 중국어과 교수가 쓴 책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은 많은 국민들을 놀라게 하였다. 동양에 성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니 무슨 뜻으로 한말일까?

한국의 행정은 조선 500년 동안 숭유배불정책으로 유교의 철학을 익히지 않으면 나라의 관료로 등용될 수 없었다. 그때의 유교행정이 오늘까지 한국에 통용되고있다.

그런데 갑자기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죽어야할 공자의 정치행정이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유교의 행정철학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조선의 행정문화가 그대로 오늘까지 한국의 행정문화로 보수유지 되고 있다.

한국의 유교행정문화는 무엇보다 권위주의적이다. 이는 정책결정권이 관료에게 집중되고 어른에게 달려있으며 상사에게 주도권이 있다. 조직의 구성원과 공유하지 못하고 극히 소수의 관료에게 의사의 결정권을 주는 것이다. 필자가 보건대 15년전까자만 해도 지방내 어른이 발언하면 그것이 곧 법이며 연장자가 말하면 질서가 되었다.

과거 모 정부가 집권하면서 권위주의를 타파한다는 명분으로 공자의 권위는 깨지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평검사와 직접 대화하며 토론을 벌이면서부터 이 나라에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그 같이 정치행정문화는 곧바로 공직과 사회문화에서 권위의 질서가 무너지기 사작하여 작금의 행정문화는 장유유서의 미풍이 사라지고 패거리 정치와 파당정치가 판을 치고 있다.

해마다 열리는 지방회나 총회에서 이같은 현상은 비일비재해서 선배와 후배의 질서가 무너지고 어른과 아이의 질서가 파괴되어 갈등이 만연되어 버렸다.

어른들을 인사권 자리에서 몰아내고 그 자리를 젊은이가 차지하는 것이 개혁이며 혁신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공자의 품위와 권위의 죽음은 어른이 어른노릇을 제대로 못함으로 일조하게 되었으며 민주의의를 잘못 곡해한 버릇없는 젊은이들의 합작품이라 말할수있다. 그러나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기독교의 조직의 문화에서 파생 되었다고 봐야 할것이다.

오늘의 개신교에는 두 개의 조직이 공존하는바 하나의 조직은 대형교회의 사기업조직이다.

교단이나 지방회의 통제가 불가능하며 세상의 재벌처럼 교회재정과 성도의 숫자로 위협을 가하는 조직이다. 교회성장(成長)이 장성목사(將星)를 만들었으니  이를 번역한 즉 장군의 목을 가진 힘있는 목사와 장로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성경적인 대형교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다음이 시민 조직인바 과거에는 시민조직(NGO) 이 약자를 변호하며 강자를 대응하는 순기능적인 조직이었으나 오늘날은 권력층과 재벌기업의 협력자로 전락해 버렸다.

작금 벌어지는 정기지방회의 행태는 구약시대에 사사시대를 방불케한다.

재벌조직과 시민조직이 공조하여 임원회조직을 조정하며 대의원 선거를 좌지우지한다. 총회대의원 선거에서 기업조직의 장군들이 앞번호를 받고 아부하며 협력하는 시민조직 운동권 후보들이 뒷번호를 받아 개선장군처럼 중앙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진정한 의미의 해석은 어른들의 독단적인 권위주의는 지양하되 양심있고 신사적인 겸양지덕의 선비정신은 계승발전 시키는 것이 주님이 바라시는 공자를 뛰어넘은 개혁교회 기독교정신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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