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교회 갱신 운동 ‘공동생활형제단’

▲ 천사장 미카엘의 이름을 따서 지은 성 미카엘교회. 교회 앞 광장에는 대형 유리 미카엘 상이 세워져 있다.
‘현대적 경건'의 중심지 쯔볼레와 데벤테르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는다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깨달음을 얻고 분별없는 마음에서 해방되려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그분의 삶과 태도를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묵상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1-1-1)

갱신을 위한 움직임 ‘공동생활 형제단’
그리스도교는 3세기 로마의 유일한 국교로 인정받는 이 때부터 지배자의 위치, 권력과 재물, 세상의 안락 속에서 편안한 삶을 누리면서 교회는 타락의 길에 빠져들게 된다. 교황과 주교의 자리는 권력다툼에 휘둘렸고 성직매매가 빈번했다. 세속화된 기독교의 모습에 회의를 느낀 사람들은 신앙의 본질을 찾기 위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막과 수도원으로 숨어들었다.

이런 시대적, 교회적 상황 속에서 갱신을 시작한 그룹이 ‘데보티오 모데르나(Devotio Moderna, 현대적 경건 또는 오늘의 헌신)' 운동이다. ‘공동생활형제단'으로 불리는 이들은 네덜란드의 데벤테르와 쯔볼레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그들의 경건의 지침을 담은 내용이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 Christi)'에 담겼다.

공동생활형제단은 헤르트 흐로테(Geert Groote)에 의해 창립됐다. 그는 데벤테르 출신으로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서 법, 의학, 신학 등을 공부하였으며 성서 말씀 따라 자신의 집을 돈 없는 여성들을 위해 내어놓은 인물이다. 또 성직자에게는 라틴어로, 평신도들에게는 네덜란드어로 설교하면서 예수의 삶을 따를 것을 강조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1376년 어거스틴의 수도원을 빈데샤임에 설립했다.

이들 단체에는 성직자 뿐 아니라 일반인들의 참여가 자유로웠고 병자 방문, 전도, 어린이들을 교육하는 일에 특히 힘썼다. 주일 집회 때는 성서를 낭독한 후 성경구절 해석에 힘썼는데, 진지한 토론은 자유로운 종교개혁적 신앙 형성을 가능케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100년이 지나지 않아 종교개혁이 발생하고 네덜란드가 개혁파에 의해 주도되면서 이들의 노력은 사실상 실패로 끝나고 만다.

▲ 흐로테 하우스 내부
흐로테의 고향 데벤테르
기차를 타고 도착한 데벤테르에서 600여 년 전 흐로테의 흔적을 찾아 첫 방문지로 ‘헤르트 흐로테 하우스'(박물관)를 찾았다. 박물관은 작은 광장 한 곁에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유리로 된 작은 건물이었다. 1층에서 10분 정도의 영상을 시청한 후 흐로테의 삶과 종교개혁자들을 소개하는 전시판을 바라봤다. 아쉽게도 전시물과 영상이 네덜란드어로 되어 있어 깊은 이해를 가로막았다.

지하 전시실은 몇 개의 전시물이 있었지만 묵상실과 같았다. 낡고 좁은 옛 교회당 같은 전시실에서 앞서 살핀 그의 삶을 조용히 묵상해본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그 또한 죽음에 대한 경험을 통해 놀랍게 변화됐고, 그를 통해 시작된 공동생활형제단이 교회 갱신의 횃불을 밝힌 것이다.

박물관을 나서 그가 거닐었을 시내를 걷다가 ‘현대적 경건의 아버지 헤르트 흐로테(1340~1384)'란 글귀가 문 옆에 새겨진 브로에더렌교회에 들어섰다. 마침 교회에서는 ‘헤르트 흐로테:오늘의 영감의 원천'이란 제목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그림과 영상, 기술 등이 종합된 듯한 전시회는 데벤테르 사람들이 자신의 도시를 흐로테의 도시로 규정하고, 그의 사유를 현대적 기술과 예술에 접목하고 있음에 놀랐다.

데벤테르의 중심교회인 레부이눈교회의 벽에는 중세 시기의 그림이 남아있으며 지하 토굴에는 많은 후원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벽이 있다. 이 후원자 명단 속에 유명한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사실 에라스무스는 공동생활형제단이 운영하는 성 레부이눈 학교에서 10세부터 15세까지 공부했다.

교회당을 한 바퀴 돌면서 교회 설립자로 추앙받는 레부이눈과 에라스무스의 삶을 연관시켜 본다. 영국 출신으로 7세기 네덜란드에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레부이눈과 네덜란드 로테르담 출신으로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 인문주의를 전파한 에라스무스. 그들의 사상적 교감이 에라스무스를 유럽의 가객, 방랑자로 자리매김시켰을 것 같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활동 무대 쯔볼레
공동생활형제단의 이상을 세상에 알린 인물이 토마스 아 켐피스이다. 그는 12세 때부터 네덜란드 데벤테르에 있는 공동생활형제단에 입단하여 신앙훈련을 쌓았으며 7년 후 형이 부원장으로 있는 쯔볼레의 아그네스 수도원에 들어가 일생을 마쳤다. 그의 책이 당시 경건과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강조했던 시대적 흐름, 즉 현대적 경건 운동의 시각을 집약적으로 담고 있음은 분명하다.

쯔볼레에 도착한 후 버스를 갈아타고 ‘아그네스 수도원' 터를 찾았다. 지금 수도원은 없고 쯔볼레 시민들을 위한 공원묘지만 있을 뿐이다. 공원묘지 입구에 1919년 가톨릭교회에 의해 세워진 “여기 토마스 아 켐피스는 주님과 함께 살았다.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썼다"라는 기념석이 세워져 있었다.

기념석 앞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에 저장해 놓은 그의 책을 찾아 읽는다. 그리고 기도한다. 주여. 그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게 하옵소서. 그리고 외양이 아니라 내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경건의 삶, 사랑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무덤들과 묘비들을 차분하게 둘러봤다. 가장 오래된 묘지들을 둘러봤지만 동시대 인물들은 없었다. 아마도 묘지는 수도원이 파괴된 이 후 조성된 것 같다. 전승된 이야기에 따르면 91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은 토마스는 수도원 동쪽 회랑에 묻혔고, 종교개혁 과정에서 쯔볼레 시가 수도원 해체를 결정하면서 그의 무덤은 폐허 속에 방치됐다고 한다. 후대에 그의 무덤은 카톨릭교회에 의해 발굴되고 1897년 유골함에 담겨 성 미카엘 성당에 안치됐다고 한다.

▲ 브로에더런교회
그를 만나기 위해 쯔볼레 시내에 들어섰다. 맨 먼저 1465년 도미니칸 수도원의 일부로 세워진 브레오렌교회에 들어섰다. 이곳 교회는 내부 성화와 오르겔 등은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지만 1640년부터는 개신교 예배당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서점과 예술연구소 등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사실 네덜란드 북부지역은 개혁파 교회가 강력한 힘을 발휘했고, 1579년 우트레슈 통일과 함께 강력한 종교개혁에 들어가 가톨릭교회는 예배를 드릴 수 없었다. 당연히 대부분의 교회는 개신교 예배당이 되거나 시의회에 몰수되어 막사나 창고로 활용됐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이곳에까지 이른 것이다.

도시 중심교회인 성 미카엘교회(Grote Kerk)를 찾았다. 이 교회는 천사장 미카엘의 이름을 따 지은 것으로, 교회 앞 광장에는 대형 유리 미카엘 상이 새로 세워졌다. 아쉽게도 성당은 겨울에는 금, 토요일만 개방했다. 결국 유일한 토마스 아 켐피스의 흔적 유골함을 보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인근 성모 성심성당(Basiliek)에 들렸다. 사람들의 방문이 뜸하지만 강단 옆 토마스를 기념하는 그림 세 점과 십자가를 진 예수님을 향해 무릎 꿇은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쯔볼레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일식당이었다. 이곳 일식당은 예전 도미니칸 수도회의 베들레헴교회였다. 식당 관계자의 허락을 얻어 내부를 둘러봤다. 교회의 흔적은 도미니칸 성당의 천정 구조와 벽에 있는 성화, 파이프 오르간 뿐이고 강단과 회중석은 탁자와 의자, 물이 담긴 수조 등이 자리했다.

하늘은 성당의 모습인데 땅은 세상을 위한 식당이  되어있었다. 서로 다른 세상이 마주보는 듯한 이 옛 교회 건물은 살펴보니 동양인으로서 미묘한 감정이 싹텄다. 전시와 문화 공간, 서점은 이해되지만 일식당은 의외라 할까? 그러나 냉철하게 현실을 봐야 한다. 한국교회 또한 이미 이와 같은 일이 시작되고 있지 않는가.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