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회의감·원망, 말씀으로 이겨내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요즘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서 곳곳에서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비극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 비극적 일이 부부 간, 부모와 자식 간, 계층 간 그리고 세대 간에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어 그 심각함이 위험수위를 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엡 4:26)고 ‘분노’에 대하여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 “화를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는 경고는 분노가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이다. 분노는 정말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형제애와 공동체를 파괴하는 아주 위험한 유혹이며 죄이다.

그래서 에베소서의 저자는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지적하며, 분노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4:31)고 명령한다. 우리는 분노가 육체적 본성에 근거한 죄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분노가 치밀 때,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함 같이 내가 마주한 불합리하고 어처구니 없는 사태, 모멸, 거짓, 스트레스 앞에서 분노로 마음을 채우기보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는”(4:32)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꼭 교회 나가야만 되나 회의가 들 때
교회에 나간다는 의미를 초기 기독교의 전통에 비추어 보면 부활하신 예수를 제일 먼저 만나보겠다는 신앙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초기 기독교에서 ‘에클레시아’ (ekklesia)로 불렀다(마 16:18; 행 8:1 등). 초기 기독교의 에클레시아는 “부름을 받았다” 라는 뜻도 있지만 “소집/출두명령을 받았다”라는 다소 법률적, 당위적 의미도 가지고 있어, 의무적인 출석, 참석의 성격이 가미되어 있다. 종합하면 우리에게 동심이 있어 마음이 가장 설레는 모임, 예를 들어 소풍, 운동회, 설날, 추석 혹은 생일잔치에 가장 먼저 가려는 그 즐거운 마음으로 가는 곳이 교회이며, 또 한편으로는 군대의 영장을 받았을 때나 법원의 출두명령과 같이 의무와 규칙으로 여기며 가야하는 곳이 교회라는 얘기가 된다.

히브리서 10:24-25a에 보면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는 말이 있다. 히브리서의 배경에는 예수를 믿는 자들에 대한 혹독한 박해가 드리워져 있다. 이때 믿음의 초보자(히 5:12-6:6)들은 미혹을 받았다. 그들은 작은 핍박과 어려움에 모임을 회피했다.

그러나 교회는 우리가 기꺼움(joy)과 매임(obligation)의 두 날개로 날아가야 하는 곳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내가 믿음의 초보자인가 스스로 물어야 한다. 그것은 교회에 몇 년 출석했고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는 것과 또 다른 하나님을 향한 지극히 개인적인 신앙의 태도를 내가 갖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말로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2~4).

소중한 사람과 이별(사별)을 했을 때
전화벨이 울리고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자, 우리는 갑자기 말문이 막힐 것이다. 더구나 그 사람이 아주 가까운 사람이면 그 큰 충격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죽음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 그리고 관계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래서 두렵다. 하지만 사람은 늘 죽음과 동반하여 살고 있다. 누구나 예외가 없다.(히 9:27)

그래서 회당장 야이로는 12살이란 어린 나이에 죽은 딸을 위해 황망히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막 5:22~24, 35~43; 병행구 등), 이미 병들어 죽은 나사로의 무덤에 늦게 도착한 예수에게 마리아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라고 읍소하며 허망함을 달랜다. 이미 초기 기독교의 신자들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바울에게 알리며 그 사람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살전 4:13) 기독교 신앙은 죽음으로 인한 이별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사도 바울은 지인들의 죽음에 슬퍼하고 있는 이들에게 “소망 없는 이와 같이 슬퍼하지 말라”(살전 4:13b)고 전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는 말씀을 믿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18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권면한다.

기독교 신앙은 죽음이 끝이며 영원한 이별이라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사로의 죽음 앞에 서 있는 마리아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물으신다. “아멘, 주 예수님 내가 믿습니다.”

시련이 닥쳐 원망이 들 때
우리에게 던져진 수수께끼 중의 하나는 왜 착한 사람이/의인이/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받는가라는 것이다. 고난은 정말 다양한 형태로 모든 사람에게 찾아온다. 만성질병, 불치의 병, 각종 사고, 장애, 관계의 단절, 재정의 악화 그리고 온갖 심리적, 정서적 어려움 뿐 아니라 심각한 죄의 문제로 고통을 당한다.

정말 고난과 고통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결국 우리는 누구나 사도 바울과 함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는 탄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고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그 분의 아들과 함께 함께 친히 고난을 당하셨고 고난이 절망과 끝이 아님을 친히 보여주셨다. 고난 가운데 위로와 희망을 주시고자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5:3~4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롬 5:3~4)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고난과 씨름한 베드로도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20)고 위로한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있다고 너무 낙심하거나 염려하는 것은 건강한 신앙을 해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를 믿고 찬송해야 할 것이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오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전 1:3~4)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