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깊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언제나 성경말씀을 곁에 두고 묵상하며 마음에 새기기를 소망한다. 성경통독을 신년의 다짐으로 결심한 성도들은 말씀을 사랑하고 성경읽기에 대한 열정도 대단하다.

그러나 성경을 단지 소지하고 맹목적으로 신봉하다보면 성경이 한낱 ‘종이교황’신세로 전락할 수 있고, 무작정 읽는다고 해서 바른 이해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므로 유의할 일이다. 잘못된 이해는 성경이 전하는 교훈을 곡해하거나 의미를 놓치게 하니 미연에 방지책이 필요하다.

한국신약학회장 윤철원 교수(서울신대 신약학)과 함께 성경의 바른 이해를 위해 ‘성경에 대한 이해와 오해’를 문답형식으로 풀어본다.

Q. 성경은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맞나요?
A. 그렇다. 성경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역사적 사건에 기초하고 있다. 성경의 역사성을 부정하거나 오해하는 사람들 중에는 세계사의 중요한 인물들이 성경에 등장하는 것을 의아해하는데 성경의 정체를 오해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는 공히 역사적으로 주요한 사건들과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물론 성경이 세계사를 기록하려고 의도한 책은 아니나 역사 속에서 실제로 발생한 사건에 근거한 실제 역사의 일부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 말은 성경의 일부만 사실이고 다른 부분은 허구라는 의미가 아니다.

성경은 실제 사건에 근거하지만 하나님이 선택한 실제 저자가 제공된 영감에 따라 전적으로 헌신한 결과로 역사에 출현했다. 이런 차원에서 성경은 ‘실제역사’와 ‘실제문학’의 두 차원을 보여준다. 성경에는 다양한 문학 장르가 적용되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읽는데 흥미를 더한다.

문학 장르를 활용한 저자들은 신학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구원이야기를 기록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과학적인 관점에 치우쳐 읽는 것은 부적절하며, 더 나아가 성경이 합리성을 결여한 문서라고 단언하는 비평적 입장으로는 영적이고 신학적인 풍부한 의미를 습득하는데 한계가 있다. 
 
Q.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쓰여졌는가?
A. 하나님은 ‘구원사’를 펼쳐 가시는 동안 만민에 대한 기쁜 소식(복음)인 성경을 기록하도록 선택된 저자들에게 영감을 주셨다. 이처럼 성경은 저자가 “하나님의 감동으로”(딤후 3:16) 기록했음을 증언한다. 이런 맥락에서 성경의 원저자가 하나님이라고 믿고 고백하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다만, 성경은 역사와 문학(literature) 그리고 신학이라는 세 차원의 결합체다. 

Q. 성경 속에는 간혹 잔인하고 과격한 사건이나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문자적으로 믿어도 되나?
A. 성경읽기 과정에서 ‘난해구절’이 나와 통독을 어렵게 만들 때가 더러 발생한다. 또는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치곤 너무 야박하고 과격한 표현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믿지 않는 개인이나 민족을 역사의 무대에서 퇴출시키거나, 한 눈이 죄를 범하게 하거든 빼버리라는 명령이 단골메뉴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의 관점에서 ‘거꾸로 읽기’를 시도하면,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이해하면 과격한 것처럼 표현된 명령이 암시하는 의미가 쉽게 파악된다.

그래서 성경말씀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 속에 함의된 교훈과 명령에 순종하게 된다. 즉 한 눈을 빼내라는 명령은 범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깨닫게 돕는 과장법의 한 사례라는 점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언제나 영적으로 회복할 뿐 아니라 내적으로 성숙하기를 기대하신다.

Q. 성경 속 은유와 상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A. 이야기로서 특징을 힐끔 훑어봐도 성경에 포함된 은유와 상징기법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짐작된다. 복음서 저자들은 고도(高度)의 시적인 표현으로 예수의 선포주제인 ‘하나님의 나라’를 은유나 상징으로 묘사해 의미를 풍성하게 한다.

최근의 성경해석은 교리에 봉쇄되거나 근본주의적으로 읽는 과거방식보다 문학적 특성을 주목하여 본문의 의미세계를 찾으라고 조언한다. 특히 성경의 많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구원의 속살을 몸으로 직접 느낄 것을 추천한다. 문학적 구조와 맥락을 읽는 세밀한 독서가 아니고선 광대한 구원이야기에 담긴 하나님의 진심을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문학적으로 묘사된 하나님의 구원은총에 꽂힌 독자라면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다는 성경말씀의 권위가 무엇을 뜻하는지 직감하게 된다. 결국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 하나님은 문자주의에 매인 채 호령하는 전제군주가 아니라 인간의 감성과 정신세계에 영적동력을 불어넣어 애정과 자비를 직접 느끼게 하신다.

Q.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의 장(章), 절(節) 구분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A. 사본을 추적하다보면 원본에는 장, 절 구분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신약성경을 작은 단위로 구분한 필사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알렉산드리아사본’(Codex Alexandrinus, 약어: A)과 ‘바티칸사본’(Codex Vaticanus, 약어: B)은 현재 사용되는 것과 비슷하게 장(章)을 처음으로 붙였는데, 마태복음을 68장으로 나누거나 본문내용을 요약하는 형식으로 ‘표제’를 달았다.

구약성경의 경우, 쿰란에서 발견된 ‘사해두루마리’가 주제별로 문단을 나눴다. 한 문단이 끝나면 다음 문단이 시작하는 곳을 빈칸으로 두거나 한 줄을 건너뛰어 확실하게 구별했는데, 이것은 독자들에게 편리성을 제공하려는 배려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지금 같은 장, 절을 구분한 것은 켄터베리 대주교 스티븐 랑톤(Stephen Langton, c. 1150-1228)이 창안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다음 16세기에 이르러 프랑스 빠리(Paris)에서 성경출판이 본격화되면서 출판업자들이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장과 절을 붙여 인쇄했다. 가장 거룩하게 취급될 문서인 성경에 장, 절을 붙인 것은 아이러니컬하게 도 상업적인 목적에서였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문서들보다 성경은 만민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단 하나의 복음이며 확고부동한 ‘세상의 빛이고 하나님의 말씀’(Lux Mundi Verbum Dei)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성경통독에 나설 일만 우리 모두에게 남았다.

Q. 성경은 언제 정경으로 확정되었나?
A. 성경에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거나 역사적으로 탐색할 때 알 수 있는 요소가 있다. 먼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사이에는 ‘신구약중간기’로 불리는 약 400년의 시차가 있는데, 이 기간은 헬라제국이 통치를 시작한 주전 4세기에서 로마제국이 성립하는 주후 1세기까지를 말한다.

알렉산더 대왕은 거대한 제국을 수월하게 통치하려는 목적으로 제국의 전 영역에 헬라식 도시를 건설하고, 용감한 시민을 양성하기 위해 김나지움(gymnasium, 오늘날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할 뿐 아니라 헬라어(Koine Greek)를 공용어(lingua franca)로 채택했다.

소위 헬레니즘(Hellenism)시대로 일컬어지는 이 기간에 헬라교육과 종교를 부추기는데 맞서 야훼신앙을 고수하려 투쟁한 마카비 가문의 활약 등을 기록한 문서들이 ‘중간기문학’의 명칭으로 남아 있다. 이 기간은 정경화(正經化, Canonization, 구약은 주후 1세기, 신약은 4세기에 마무리)작업과 중첩되는데, 외경(Apocrypha)이란 이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정경(正經, Canon)은 ‘팔레스타인 정경’과 ‘알렉산드리아 정경’으로 크게 나뉜다. 복음주의교회는 중간기문학에 속하는 문서들을 외경으로 취급하나, 서방교회인 로마카톨릭교회(동방교회/정교회는 예루살렘 시노드에서 토비트, 유딧, 솔로몬의 지혜서, 집회서만 정경에 포함시킴)는 트리엔트공의회(1545-1563)에서 제2정경(Deuterocanon)으로 채택했다.

이것은 주전 3세기에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LXX, Septuagint)에 들어있는 문서들을 수용한 알렉산드리아 정경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복음주의교회에서는 66권(구약 39권+신약 27권)만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문서로 인정하는 팔레스타인 정경을 더 권위 있는 경전으로 받아들였다.

Q. 성경의 사본이 없는데, 어떻게 진실하다고 믿을 수 있는가?
A.성경은 원본이 사라진 상황에서 사본으로 베껴 써서 전달하는 과정을 거쳐 우리의 손까지 들어왔다. 성경이 필사된 것은 특정구절이 본문에 없다고 명시된 사례들(마 17:21; 18:11; 23:14; 막 9:44; 11:26; 15:28; 눅 17:36; 요 5:4; 행 8:37; 15:34; 24:7; 29:29; 롬 16:24)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례만을 가지고 성령의 영감을 믿지 못하거나 성경의 권위를 부정할 순 없다. 원본이 없는 상황에서 권위 있는 여러 사본을 종합하는 수순은 당연하고도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을 호도해 사본에는 오류가 많다고 주장하면서 원본복구의 불가능성까지 공연히 부풀리는 견해는 터무니없다. 단어철자의 차이를 과장해 읽는 것은 바른 독법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예수’가 ‘주님’이나 ‘그분’으로 표현되었다고 해서 필사자가 다른 의미를 덧붙였다고 한다면 그건 어불성설이다. 성경의 사본들은 수없이 많지만, 완벽하게 복원될 만큼 보존상태가 양호하게 전달되어 왔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