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직업관’(창 3:24)

우리는 ‘일’을 형벌의 대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인류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하나님께서 주신 형벌의 내용 때문일 것이다. 인류에게 내려진  형벌이란 하와에게는 해산하는 고통을 아담에게는 땅의 소산을 먹기 위한 수고가 있게 하셨다.

하나님은 “… 에덴 동산에서 그를 (아담을) 내보내어 … 땅을 갈게(히.아바드) 하셨다.”(창 3:24) 이 구절에서 ‘땅을 갈다’는 히브리어로 ‘아바드’라고 하는 말을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일하다’ 혹은 ‘돌보는’ 노동을 의미한다. 언어의 뉴앙스를 알아내는 일이야말로 원어성경을 읽을 때 필요한 가장 중요한 핵심이자 유익함이다.

성경에서 ‘땅을 갈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아바드’는 상당히 긍정적인 뉴앙스가 농후한 용어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신 후 에덴 동산을 ‘돌보게’(창 2:15, 경작하며) 하시려고 할 때 사용되었던 단어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을 ‘돌보는 일’을 사람에게 맡겨 주신 것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일이란 인류가 타락한 이후에 주신 형벌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타락 하기 전에도 이미 ‘일’ 혹은 ‘노동’을 하도록 인간을 부르셨다는 점이다. 인류가 타락하기 전에도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일을 할 수 있는’(히. 아바드)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다스리고(히. 아바드) 지키게 하셨던 것이다.(창 2:5)

즉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많은 목적 중 하나가 바로 이 땅을 돌보는 일이었다. ‘노동’이라는 것은 타락하기 전에도 땅을 경작하는 노동이 있었고, 인류가 타락한 이후에도 땅을 경작해야하는 노동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타락의 결과로써 수고하고 얼굴에 땀이 흘러야 하는 ‘노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단서를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하는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아담이 평생에 하여야 하는 ‘수고’ 역시 인류가 타락하기 전에 했어야 했던 ‘땅을 경작하는 일’을 의미한다. 이는 인류가 타락하기 전에도 인간에게 주어졌던 경작과 동일한 노동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성경은 아담이 평생에 하여야 하는 ‘일’을 ‘돌보다’(히.아바드 창 2:5,15)라는 의미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고통스러운 노동’(히.이짜본 창 3:17)으로 말을 사용하였다. 즉 타락한 이후에 하였던 ‘일’은 타락하기 이전에 하였던 ‘일’과는 달리 힘든 노동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타락하기 이전의 일은 기쁜 일이었다. 즐거운 일이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돌보는 일은 너무나도 즐거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타락한 이후에는 노동(히.이짜본)이 되었다. 고통이 되었던 것이다.

‘일’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그 일 가운데 나를 불러주셔서 하게 되었다고 믿고 일하는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일’은 곧 소명이다.  아마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 전하는 일을 소명으로 알고 하였기에 그들의 생명도 돌아보지 않고 목숨을 바쳤을 것이다.

이는 크리스챤이 자신이 맡겨진 일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할 이유이다.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해서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분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일이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셨다는 확신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목숨을 다하여 그 일을 수행하여야 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일의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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