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유아부에서 예배를 드렸다. 설교 시간에 담당 전도사가 어린이들에게 질문을 한다. ‘크리스마스는 무슨 날이에요?’. 이어지는 아이들의 대답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산타 할아버지 오시는 날이요’, ‘선물 받는 날이요’. 텔레비전에서 산타이야기를 방영하고 어린이집마다 산타잔치를 하는 상황에서 ‘예수님 오신 날’, ‘예수님의 생일날’은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다.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산타 잔치에 쓴다고 선물을 보내라고 한다. 어린이들이 위화감을 갖지 않도록 A4용지 정도의 크기로 잘 포장해 보내란다. 백화점에서 고급 제품을 살 형편도 아니고 어린아이에게 너무 비싼 것은 마이너스라는 한 교육전문가의 충언을 알기에 교회학교 교사들이 자주 찾는다는 동대문 완구와 문구 시장에 들렀다.

아이는 파워레인저 레지큐포스와 G블레이드, 공룡킹 어드벤쳐 완구를 놓고 고민이다. 어떤 것을 사야 친구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지 고르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아이는 하나를 골랐고 나도 아이 몰래 하나를 샀다. 산타 잔치에 보내기 위해서다. 성인이 되어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릴 나이는 아니나 아이 핑계로 나도 ‘산타 성탄절(?)’에 과감히 동참했다.

얼마 전 부터 한 교단과 교계 단체를 중심으로 ‘성탄절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다. 산타와 트리, 소비에 갇힌 성탄절의 본래 의미, ‘아기 예수 오신 날’의 참의미를 회복하자는 운동이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고 성탄 트리가 온 길거리를 수놓지만 그것은 손님을 부르는 호객꾼의 행위일 뿐이며 성탄절은 ‘잊혀진 계절’이 되어 버린 지 오래기 때문이다.

붉은 색의 구세군 자선냄비마저 없었다면 성탄절은 이미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있지나 않았을까 하는 불안한 생각까지 들 정도다. 그런 점에서 ‘성탄의 바른 의미 찾기’는 설득력 있는 구호임은 분명하다. 다만 아이들에게는 예외로 해주어야 도리일 것 같다. 미성숙한 어린이들에게 ‘눈에 보이는 선물’을 나눠주는 산타는 ‘보이지 않는’ 예수님 보다 조금은 더 설득력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를 대표하는 지성 중 한사람이 최근 저술한 책에서 한국교회에 대해 태어나고 죽고,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는 예수만 기념하다가 그분의 살아온 삶, 하신 말씀, 사역을 잊어버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분의 삶인데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태어남과 죽음, 부활만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따르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번 성탄절에 아기 예수님이 아닌 어른 예수님을 만나야 할 듯 싶다. 매년 아기 예수님을 맞이한 한국교회이니 한번 어른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다. 다만 익숙하지 않은 만남이 되지는 않을까 우려스럽긴 하다.

성경에 따르면 어른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와 게네사렛, 눈멀고 귀먹은 환자들이 구걸하는 길가에 계실 가능성이 높다. 성경(마 25:34~40)에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은 사람들이 “제가 언제 주님께 잡수실 것과 마실 것을 드렸고 나그네 된 것을 영접했으며 입을 것을 드리고 감옥에 찾아갔습니까?”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여기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어른 예수님은 오늘 구세군의 자선냄비 현장에서, 서해안 주민을 위로하는 콘서트장에서, 연탄 배달을 하는 청년들과 그들에게 따뜻한 물 한 컵을 내미는 우리 이웃들의 모습에서, 그리고 뜨거운 밥을 퍼주는 아주머니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받은 노숙자의 환한 미소와 함께 있는 것은 아닐까?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며 종을 울리고, 노래를 부르고, 연탄을 배달하고 뜨거운 밥을 퍼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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