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상에서도 다시 살려주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대 약대에 진학했다. 한국전쟁 당시였기 때문에 1, 2학년은 피난살이하던 부산에서 대학을 다녔고 3학년부터는 서울 캠퍼스로 돌아왔다. 서울대 약대는 당시 을지로 6가에 있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내가 자취할 만한 거처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고심하던 중 한 친구가 나를 찾아왔다. 피난 와서 우리 교회에 출석하던 서울 성동고교 3학년 배종윤 군이었다. 배 군의 본가가 마포 도화동에 있었다. 거기서 집세 없이 자취를 하라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배 군은 아래채를 쓰고 김해 출신 약대 친구 김영철과 나는 본채를 쓰기로 했다. 얼마 안 돼 김 군은 친척집으로 가고 나 혼자의 자취 생활이 시작되었다.

젊은 시절 궁색한 자취생활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아침에 저녁밥까지 한꺼번에 많이 지어놓고, 반찬은 콩나물에 소금을 넣어 끓여 먹는 게 전부였다. 가끔 국물 색깔을 내기 위해서 간장을 조금 넣기도 했지만 그것도 부담스러워 대부분 그냥 먹었다.

고학생의 자취 생활이란 궁핍의 연속이었다.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점심시간에는 밖에 나와 수돗물로 배를 채우기도 했다. 그냥 꾹 참고 지낼 때가 더 많았다. 주위 친구들의 시선을 의식해서이다. 그렇게 하다 보니 속이 쓰려서 위궤양이 왔고, 소변색은 노랗게 변하면서 간염까지 오고 있었다. 영양실조로 몸이 허했다.

집에서는 자취할 생활비를 잘 보내지 못했다. 어머니가 하시는 쌀 장사가 잘 안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활비를 못 보내게 되니 어머니는 밤새도록 “우리 동환이 굶어죽겠다”며 잠을 못 이루셨다고 한다. 그리고 새벽기도를 나가서 눈물로 간구하신다는 말을 나중에 동생에게서 들었다.

나는 어머니를 좀 도와야겠다고 생각하여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았다. 마침 지금은 고인이 된 박무용 선배가 남산에 6·25전쟁으로 폐허된 고가를 철거하는 일을 소개시켜 줬다.

대학교 3학년 때였다. 그때의 학교 수업은 오전에 이론 수업, 오후에는 실험 시간으로 배정되어 있었다.
실험 시간을 빼먹고 아르바이트를 찾아 남산 현장으로 갔다. 아침 식사는 대충 먹고 점심은 먹지 못하면서 하는 육체노동이니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었다.

5일째 되는 날 위층에서 망치로 건물을 부수다가 순식간에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렸다. 박무용 선배가 내 뺨을 치면서 그렇게 나를 불러댄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소리는 들렸지만 앞이 캄캄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신이 천천히 돌아오면서 노랗던 시선이 희미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뇌가 상하지 않도록 4분 내에 숨을 쉴 수 있게 해주셨고, 나를 혼절 상태에서 살려주신 것이다. 정신을 수습하기 위해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을 때, 현장 감독이 그냥 가라고 했다는 말을 박 선배가 전해왔다.

야속하기도 하고 좀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오후에만 한 일이었지만 5일 동안 일한 대가를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다시피 하는 나의 심정은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우선 마을로 내려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남산 공사 현장에서 무조건 서쪽으로 난 산길을 걸었다. 이 오솔길을 끝까지 가면 큰 길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산등성이 오솔길을 한참 걸어가는데 길 옆 풀밭에 묘가 한 기 눈에 들어왔다. 순간 내 마음에 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곳에서 하나님께 증거를 남겨야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묘지 앞 풀밭에 무릎을 꿇고 울부짖으며 외쳤다.

“하나님! 나는 이렇게 안 하면 공부할 수 없습니까?”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비참하게 여겨져 슬픈 눈물이 솟구쳤다. 기도가 끝나지 않았지만 그렇게 기도만 할 수 없었다.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니 마음의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동네에 이르니 아낙들이 나를 동정어린 눈길로 쳐다보는 것 같아 급한 걸음으로 집으로 향해 서울역을 지나 용산을 거쳐 전차로 철길을 따라 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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