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이 살아야 설교가 산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 만약 회중의 귀에 설교가 들리지 않는다면 그 설교는 설교의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사려깊은 설교자는 ‘서재에서’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 하는 만큼이나 ‘강단에서’ 어떻게 전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설교는 원고를 지나 강단에서 말하는 행동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목양실에서 강단까지 걸어가는 거리보다 강단에서 회중석까지의 마음의 거리가 훨씬 먼 법이다.

주일 오전, 설교자는 목양실에서 걸어나와 강단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를 응시하고 있는 회중을 향하여 설교자는 입을 연다. 그렇게 설교는 시작된다. 그러나 설교자의 첫마디와 함께 시작되는 그 짧은 몇 분의 이야기는 전체 설교의 운명을 좌우한다. 그것이 바로 설교의 서론이다.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예배의 모든 순서가 서론이며, 예배에 참여하는 회중은 설교를 듣기 위해 나왔기 때문에 굳이 설교의 서론이 필요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신학자의 회중과 오늘날 우리의 회중은 조금 다른 것 같다. 현대 교회의 모든 회중들이 설교시간을 사모함으로 회중석에 앉아 있지는 않은 것 같다.

특히 명목상의 신자가 늘어가는 현대 교인의 추세를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현대의 많은 설교학자들은 많은 설교자들이 가지는 착각 중 한 가지는 모든 회중들이 자신의 설교를 듣기를 사모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따라서 어떻게 설교를 시작하는가 하는 것은 현대강단에 중요하다. 

많은 설교학자들은 설교가 시작되자마자 회중들은 2~3분 이내에 이 설교를 계속 들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한다고 한다. 심지어 강해설교학자, 해돈 로빈슨(H. Robinson)은 청중은 설교가 시작되자마자 30초내에 설교의 경청 여부를 결정한다고까지 주장한다. 학자간의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분명한 것은 설교의 서론은 회중과 맨 처음 만나 회중의 마음에 진리의 말씀이 뻗어갈 넓은 대로를 열거나 혹은 넘기 힘든 높은 마음의 장벽을 쌓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설교의 서론은 어떤 성격을 띄어야 하는가?

첫째, 서론은 설교의 본론을 진두지휘한다. 작은 서론이 큰 덩치의 본론을 끌고 간다. 따라서 서론은 설교의 머리요, 목이다. 만약 머리는 호랑이인데 이어 나오는 몸이 사자라면 그것은 돌연변이 일 것이다. 이와같이 설교의 서론은 뒤이어 나올 몸통인 본론을 연결하는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무의미한 우스개소리나 본론과 상관없는 예화는 설교의 시작부터 머리와 몸통을 어긋나게 만든다.

둘째, 서론은 기린처럼 너무 목이 길어서는 안 된다. “그가 식탁을 차리는 시간이 너무 길어 입맛을 잃어버렸다”는 속담처럼 서론이 지나치게 길면 설교의 신선함은 사라져버리고 청중의 관심은 빠르게 식기 시작한다. 설교의 정황상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적절한 서론의 길이는 전체 설교의 10% 내외이다. 

셋째, 서론은 설교자의 눈과 회중의 눈이 만나야 한다. 서론의 원고 준비에서 자칫 설교자가 놓치기 쉬운 것이 이 대목이다. 설교자가 강단에 서는 것은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확신하기에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다.

이야기를 하러 올라온 자가 상대방의 눈을 응시하지 못한다면 그 이야기는 시작부터 상대방의 주의와 집중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반면 설교자가 편안함과 확신 속에서 회중을 바라보며 설교를 시작하면 회중은 더욱 마음의 문을 활짝 열게 될 것이다.

설교의 서론은 중매쟁이다. 모름지기 말씀과 회중들이 잘 만나도록 중신을 잘 서야 훌륭한 서론이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