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7:5~6

목회 현장에서 만나는 수많은 문제들 가운데 사역의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믿음을 구하기보다, 기도의 능력을 구할 때가 더 많았다. “부흥을 주옵소서! 능력을 주옵소서! 변화시켜 주옵소서!” 그런데 이 말씀은 10절로 내려가 보면 믿음의 자세를 통해 주님이 제자들에게 전하시고자 하는 확실한 메시지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명령에 충성하면서 고백할 것은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나는 내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라는 것이다. 나는 “사역의 어떤 것도 주님이 하신 것이지,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사역을 맡긴 것도 주님이 하신 것이지,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닙니다”라는 고백 속에서 다시 한번 주님의 명령에 순종을 결단한다. 그러고 나니 본문의 명령기도는 종의 기도가 아니라 왕의 기도인 것을 깨닫게 된다.

왕은 명령할 권한이 있다. 종들은 이것을 감히 불복종 못한다. 종이 왕의 명령에 순종했다고 보상을 요구하거나 자기 공로를 자랑할 수도 없다. 주인이 원하는 것을 다 채우고 난 후에야 자기 필요를 해결하는 것이 종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 종의 자세에 왕의 권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믿음을 더하는 길임을 깨닫는다. 제자들은 주님께 충성을 다하는 종의 자세에서 왕의 명령을 대언하는 왕 같은 종의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셨다. 특히 목회자에게 주어지는 사역에는 제사장적인 사역은 기본이거니와, 왕적 사역은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 매우 중요하다. 바로 다스림의 권세 없이는 한 영혼도 마귀의 진에서 건져낼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다스림의 통로가 되는 왕적 기도는 명령하는 말 한마디에 마귀도 벌벌 떨며 흑암의 지배권을 포기하고 떠나는 것이다. 왕의 명령 기도는 세상의 주관자의 사망권세도 떠나고 마는 것이다.

나는 이 본문을 통해 나의 목회 현장에서 왕적인 기도를 드리며 선포하는 기도를 회복하리라는 결단을 하게 되는 순간, 나는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주인님,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나는 최근 토마스 아켐프스의 ‘주인님, 나를 바칩니다’라는 책을 읽으면서, 오늘날 그리스도를 이용해 자기 이름을 내려는 사람이 많고 이름없이 섬기는 사람이 적으며, 예수님은 가시 면류관을 쓰셨으나 황금 면류관을 쓰려는 사람은 많으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조롱받으셨으나 영광을 취하려고 연연해하는 기독교에 대한 경종의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 왜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런 현상에 빠지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는 영접하였지만, 매일 순간순간 주인으로 모시는 종의 자세가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깨닫는다.

“나는 주인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라는 신앙고백 없이 우리의 사역 현장에 기적은 없다. 나는 처음부터 기적을 일으킬 힘이 없었다. 다만 주님이 종으로 부르셔서 순종할 뿐이다. 오늘도 수많은 기도 제목 앞에 “주인님,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를 고백하면서 무엇을 명령하도록 지시하는지 주님께 묻는다. 그것이 그대로 순종하는 환상을 보면서 말이다. 종으로 우리를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대강절에 다시 한번 나의 주인님으로 영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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