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렬한 순교와 이어진 사랑과 헌신

1950년 10월 4일 저녁, 47명의 교인이 삼일저녁 밀실예배를 드렸다. 이 장로 형제가 목포에서 석방 된지 일주일째 되는 날로 그가 귀향하여 드리는 첫 예배였다. 설교가 끝나고 찬송을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밖이 소란하더니 총과 몽둥이 죽창을 든 공산당들이 문을 박차며 들이닥쳤다.

그들은 눈으로 교인들을 밖으로 끌어내고 땅바닥에 무릎 꿇린 다음 ‘예수 믿지 않겠다고 손들고 나오면 살려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손들고 나오는 교인은 한 사람도 없었고 총과 칼, 몽둥이와 죽창을 든 공산주의자들은 성도들을 포승줄로 포박한 뒤 형장으로 끌고 갔다.

공산주의자들은 몹시 서둘렀고 빨리 가라고 노모의 등을 밀어댔다. 새벽에 처형장으로 끌려가던 모친 남경엽 성도가 힘에 겨워 길바닥에 쓰러졌고 이판일과 이판성 형제는 어머니를 등에 업고가게 해달라고 통사정하여 노끈에 묶인 몸으로 노모를 교대로 업고 갔다.

이 장로는 조용히 노모를 불러본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나야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마는…” 노모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낀다. “어머님은 제가 어렸을 때 늘 저를 업고 일을 하셨지요, 그리고 제가 걸음을 걸을 때에는 어린동생이 어머니 등에 업혔지요. 그러나 이제, 천국 가는 마지막 이 길에서는 제가 어머니를 업고 갈 수 있으니 진실로 감사할 뿐입니다.” 세 모자의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그들은 3km나 되는 험난한 새벽길을 더듬으며 처형장 백산(白山)에 당도했다. 악도들은 성도들의 포승줄을 풀고 미리 파놓은 큰 구덩이로 밀어 넣었다. 이 장로는 악도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부탁하네. 우리들은 아무래도 좋지만 내 어머니만큼은 다른 방법으로 가시게 해주게.” 그때 노모가 이른다. “얘들아, 예수 믿는 사람답게 당당히 죽자!” 노모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악도들은 “그래, 어디 당당히 죽어봐라, 이 늙은이야!” 그리고는 미친 듯이 죽창으로 노모를 찔렀다.

이 장로 가족들은 피투성이가 된 노모를 감싸 안는데 5살짜리 어린 손자가 “왜 우리 할머니를 찌르는 거야! 왜” 절규하며 달려든 어린 것을 그들은 발로 찼다. 힘없이 나뒹굴던 손자는 다시 달려들자 그들은 인정사정없이 죽창으로 찔렀다.

이 장로는 무릎을 꿇고 최후의 기도를 드린다. “주여, 부족한 종과 우리 모두의 영혼들을 받아주소서! 또한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옆에 있던 악도는 “죽을 놈이 무슨 기도야” 라고 냉소하며 몽둥이로 이 장로의 뒷머리를 치니 그의 육신은 구덩이로 굴러 떨어진다.

이 장로의 죽음과 동시에 “찔러라”고 외침이 들렸고 죽창에 의해 모두 희생을 당했다. 달빛 희미한 그날 이판일 장로를 비롯한 47인의 영혼들은 주님의 품에 안식하게 되었다. 그 뒤 이판성 집사의 9세의 어린 딸 완순은 악도에게 죽임당해 갯벌에 가매장됐다. 진리교회 48명의 성도가 이렇게 순교를 했다.

1950년 10월 30일 국군의 수복으로 고향에 돌아온 장남 인재는 원수들을 모조리 잡아 야산공터 처형장에 세우게 된다. 부모와 가족들의 한을 풀 시간,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아버지의 음성이 귓가에 쟁쟁해 멈칫했다. “아들아, 내가 그들을 용서했으니 너도 그들을 용서하라!” 이인재는 일시에 온몸의 힘이 쭉 빠져 힘없이 쓰러졌다.

시간이 지나 눈을 뜬 이인재는 정벌부대장에게 부탁하여 악도들의 처리권을 위임받고 원수들의 결박을 풀어주며 “당신들이 죽인 내 아버지가 당신들을 용서하셨으니 나도 당신들을 용서합니다.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고 다시 혼절한다.

그 후 이인재는 그들의 울타리가 되어 주었고 자녀들의 결혼식에는 주례까지 맡아 축복하며 사랑을 베풀었다. 그들 또한 신앙지도를 받아 집사와 장로로 충성한 이도 있다. 이인재는 아버지가 경작하던 땅 1000평을 팔아 아담한 교회당을 세웠고, 목사가 되어 임자진리교회에서 34년 시무한 후 원로목사로 추대 받았다. 순교자들은 오늘도 천상에 우리 모두를 위해 기도를 쉬지 않으며 찬란한 천국에서 만남을 고대하며 그날까지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리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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