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모·김응조 등 초기 성결교회 구성에 전력
이성봉·정진경 등 성결교회 부흥·연합 영향

성결교회의 역사는 신앙 선배들의 눈물어린 헌신과 사역으로 이어져 왔다. 일제의 탄압과 한국전쟁을 통해 고난을 겪었고 기성과 예성이 분리되는 아픔도 있었다. 그럼에도 성결복음을 향한 목회자들의 헌신은 성결교단을 지켜냈고 지금의 성결교회를 만드는 초석이 되었다. 지난 주에 이어 성결교회 주요 교역자들의 사역을 소개한다.

OMS와의 가교역할 최석모 목사
박문수 박사(목신원)는 최석모 목사를 탁월한 행정가로 설명했다. 최석모 목사는 초기 성결교회 지도자로 이명직 목사와 함께 일하던 교단의 핵심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한국성결교회와 동양선교회 사이에서 가교역할을 했던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였다.
그가 동양선교회 선교사들을 위한 통역자로 임명되면서 그의 리더십은 더욱 빛났다. 성결교회의 모든 통역을 도맡아 할 정도로 한국 교회에서 명성이 높은 설교통역자로 알려져 있다.

성결대 초대학장 김응조 목사
배본철 박사(성결대)에 따르면 김응조 목사는 목회자이며, 부흥사, 신학자임과 동시에 방대한 양의 글을 쓴 저술가였다. 또한 김응조 목사는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설립의 주역이었다. 1962년 9월 20일 김응조의 사택에서 50명의 입학생을 받아서 ‘성결교신학교’를 개교했다. 성결교신학교(성결대)는 성경적 복음주의 신앙노선에 근거한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전통과 웨슬리안-알미니안주의의 신학교리를 학교 이념으로 했다. 성결교신학교의 명예교장으로 이명직, 초대 교장으로 김응조가 취임했다.

해방 후 첫 총회장 박현명 목사
박현명 목사는 해방 직후 4차례나 총회장으로 연임됐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 2년 4개월 동안 미국에서 신학을 연구하고 돌아와 한국 교회와 미국 교회의 협력을 강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해방 후 적산으로 분류된 한국성결교회를 되찾아 오는데 온갖 힘을 기울였던 지도자였지만 납북된 비운의 목회자였다. 주승민 박사는 “박현명 목사는 고등 비평학의 성서이해를 완전히 거부하고, 성령론적인 성결운동의 방향에 선 교회 지도자로서 매우 선명한 리더십의 소유자였다”고 말했다.

한국교회의 대표 부흥사 이성봉
이성봉 목사는 그를 부흥사로 임명한 성결교회 뿐 아니라 다른 교단의 교회들에서도 부흥성회를 다수 인도하는 등 경계를 넘나드는 활동으로 한국 교회로부터 폭넓은 관심을 받아왔다.
그는 성결교회의 경성성서학원에서 신학을 배우고, ‘성결’을 비롯한 ‘사중복음’에 관한 설교도 많이 했지만 그의 설교의 기초이며 핵심을 이루는 것은 ‘철저한 마음의 회개’였다. 이성봉 목사의 복음은 교파주의를 넘어 근대기독교의 복음주의적인 전통을 잇는 것이었으며, 또한 종교개혁적인 사상에도 상당히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박형신 박사(남서울대)는 “이성봉 목사는 교회사적 안목과 순수한 기독영성, 그리고 목회자적 열정을 지닌 부흥사였다”고 말했다.

한국교회 연합운동 이끈 정진경 목사
정진경 목사는 학자로서, 목회자로서, 기독교복지가로서 다양한 활동을 했다.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한국 교회의 연합운동에 남긴 큰 족적이다. 그는 한국 교회 연합운동을 위해 스스로 중재자 역할을 감당했다.
장금현 박사(세계서이버대)는 그의 교회연합활동을 세 단계로 구분했다. 첫 단계는 서울신대 교수로 재직 중에 참여해 활동한 시기다. 전국신학대학협의회 임원, 한국군기독교회 고문, 동북아신학교교육협의회 실행위원, 한국신학연구소 이사로 활동한 것은 재직 중의 일이다. 두 번째 단계는 학교를 사임하고 신촌교회 담임으로 부임해 활동한 시기다. 지역사회와 기관과 연계해 어린이집을 운영하거나 지역 청소년을 돕는 일을 했다.  세 번째 단계는 1981년 총회장으로 당선된 이후 본격적으로 성결교회를 대표해서 초교파적인 연합활동에 전념했던 시기이다. 그의 연합운동은 1980년대부터 강하게 일어났던 복음주의 연합운동과 중복된다.

이날 강연은 한국성결교회 인물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향후 책으로 발간된다. 박명수 교수는 “과거 신앙선배들의 헌신의 사역이 지금의 성결교회를 있게 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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