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복된 성탄의 계절이다. 하지만 작금의 세상은 맘몬과 바알의 노랫소리만 울려 퍼질 뿐 아기 예수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복하고 기뻐하는 모습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거리마다 산타클로스와 징글벨 등 상업적인 것들로 가득해 정작 예수의 자리는 없다. 거리의 가로수에는 전깃줄이 칭칭 감겨 눈을 흐리고, 백화점 등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에는 아무런 의미 없는 거대한 트리가 바벨탑처럼 하늘을 찌르고 있다.

성탄절 특수로 한 몫 챙기겠다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 수 있을까에만 몰두한다. 이들에게는 아기 예수의 탄생보다는 어떻게 산타클로스를 팔아 매출을 올릴까 고민하는 성탄절인 셈이다. 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깃줄로 묶어 상업적인 도구로 전락시키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그 어떤 날보다 경건하고 은혜가 넘쳐야할 성탄절이 이렇게까지 상업적으로 변질된 원인은 무엇일까. 단순히 사회가 물질만능주의와 자본주의에 함몰되어 있어서일까. 그보다는 이 사회에 성탄절의 소중한 의미를 선포해야할 교회의 무책임한 행태가 원인일 것이다.

사실 교회는 성탄절을 은혜롭게 잘 지키고 있다. 문제는 교회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세상이 성탄절을 상업적인 도구로 어지럽히고 있는데도 뒷짐지고 교회만의 성탄절을 기리고 있다. 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전깃줄에 감겨있는데도 교회는 ‘나 몰라라’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 세상의 구원과 평화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런 모습을 원했을까. 교회의 담을 높이 쌓고, 세상을 향한 구원의 목소리를 삼켜버리길 원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분명한 것은 교회가 먼저 세상을 향해 모범을 보이고, 그들이 바른 길로 돌아설 수 있도록 빛을 비추길 원하셨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근본적인 목적이다.

지구촌 곳곳에는 각종 전쟁과 테러, 기아, 환경재앙 등 숱한 문제로 인해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조차 버겁다.

시리아 등에서는 죄 없는 민간인들이 연합군의 보복폭격과 IS의 악행으로 두려움에 떨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또한 아프리카 등 제3세계에서는 가난과 굶주림으로 하루도 연명하기가 힘들다. 국내에서도 소년소녀가장을 비롯해 독거노인, 미혼모 등 소외된 이웃들이 추운 겨울을 맨몸으로 맞서고 있다.

이 상황에서 교회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과 평화로 오신 것처럼 교회는 사랑과 평화가 온 세상에 흘러넘치도록 실천에 옮겨야 한다. 그들의 아픔을 감싸주고, 상처난 마음을 치유하는데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오신 아기 예수의 탄생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도록 나눔과 섬김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교회가 소외된 이웃을 향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가설 때 비로소 아기 예수의 탄생이 빛을 발할 것이다.

교회가 세상을 버리면 하나님은 곧 교회를 버리실 것이다. 교회는 성탄절을 맞아 세상을 구하려는 노력을 다해야 한다. 갈릴리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문둥병자, 혈루병자, 정신병자, 고아, 과부, 힘없는 어린이, 어부, 농민, 세리들과 함께 했듯이 교회는 전 세계의 고난당하는 이웃과 함께 해야 한다.

이 땅의 우는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눌린 자들에게 자유함을 주고, 갇힌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교회의 최우선 과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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