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보산 정상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본 느보산 정상. 저 멀리 가나안(이스라엘)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 하여 40년간 인도했던 모세는 자신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원했다.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신 3:25)’ 그러나 모세는 므리바 물 사건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까닭에 가나안 입성을 허락 받지 못했다.
“너는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신 3:27)”
하나님은 가나안 정복 전쟁을 위해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울 것을 명령하시고 모세의 가나안 입성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느보산(일명 비스가산)은 모세가 가나안(이스라엘) 땅을 바라보며 사명을 마친 곳이다.

전망대에는 예루살렘, 여리고, 베들레헴 등의 지명에 따라 방향과 거리를 표시한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이 봉우리 서쪽을 바라보면 거칠 것 없는 광야가 펼쳐지는 데 맑은 날에는 여리고까지 조망이 가능하다. 

느보산에 세워진 모세 기념교회 앞에는 이탈리아 피란체의 조각가인 지오바니 판토니의 작품이 관광객의 눈길을 끈다. 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을 살린 놋뱀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조화시킨 뛰어난 작품이다. 

사해, 요단강 골짜기, 여리고 및 예루살렘의 먼 언덕들이 내려다보이는 느보산 정상에서 모세는 자신이 발 디딜 수 없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다. 모세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여호수아를 새 지도자로 세우고 자신의 마지막 길을 떠난다. 그는 죽어서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으나 그가 묻힌 곳은 알려진 바 없다.

모세의 뒤를 이은 지도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정복 전쟁을 치르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에 정착했다.              

모자이크 도시 ‘마다바’
마다바와 그 내륙지역은 구약에서 메드바라는 이름으로 수차례 언급된다. 이곳은 원래 모압 족속의 땅이었다가 아모리 족속에 의해 정복됐다.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나와 가나안으로 향하는 도중에 당시 이곳을 차지하고 있던 아모리 왕 시혼에게 왕의 대로를 통과하는 것을 허용해 줄 것을 부탁하지만 시혼은 이를 거절했다.

이어 아모리 왕 시혼은 군대를 이끌고 나와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 민족과 전투를 치른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여 이곳을 차지한다. 가나안 정복 후에는 이스라엘 12지파 중 하나인 르우벤 지파가 이곳을 분배 받았다.

마다바는 747년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880년대 초 길하렛셋(카락성)에서 핍박을 피해온 2000여 명의 그리스도인에 의해 다시 개발됐다.

당시 카락성에 살았던 기독교인들과 이슬람 사이에 종교 문제로 충돌이 생겨 수적으로 열세였던 그리스도인들은 오스만 터키 당국에 이주해 살 수 있는 땅을 달라고 요청해 이곳을 배정 받았다.   

AD 4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번성을 누린 교회 중심지였던 마다바는 세계 최고의 비잔틴 모자이크 컬렉션 중 하나를 탄생시켰는데 모자이크 다수가 아직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일부 교회의 바닥에 그려진 모자이크는 기존 소재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반면 기타 모자이크는 마다바 고고학 공원에 이전되어 보존 전시되고 있다.

마다바의 최고 걸작품은 성 조지교회에 소재한 AD 6세기의 예루살렘 및 성지 모자이크 지도다. 이 지도는 형식을 불문하고 고대로부터 전승된 가장 오래된 성지 종교 지도이다.

수만 개의 자연석을 이용한 이 지도는 훼손되어 원래 크기의 일부분만 남아있다. 원래 이 지도는 가로 5.6m에 세로 15.7m이고 넓이는 약 30㎡ 크기였으나 지금은 3분 1 정도가 남아 있다.

세례 요한이 갇힌 마케루스
세례 요한이 갇힌 곳으로 알려진 ‘마케루스’는 헤롯대왕의 궁전으로 세워진 곳이다. 언덕 정상에 위치한 면적이 9000㎡에 이르는 유적지이다.

세례요한이 갇힌 마케루스
하스모니안 왕조의 알렉산더 얀네우스(BC 103~76년)는 나바테안에게서 자신의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요새를 세웠고 로마가 이곳을 정복하였으며 폼페이우스가 주전 67년에 파괴시켰다.

 헤롯대왕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곳에 궁전을 재건했다. 세례 요한은 헤롯 안티파스의 결혼을 반대한 것 때문에 이곳에 갇혔다가 참수형을 당했다.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마 14:3~4)’

헤롯의 생일 날 헤로디아 딸 살로메의 춤에 마음이 흡족해진 헤롯은 살로메에게 소원을 묻고 살로메는 어머니가 시키는데로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한다. 요단강가에서 천국이 가까이 왔음을 알리며 예수님에게 물세례를 주었던 세례 요한은 이 사건으로 사명을 다하고 순교한다.

예수님이 세례 받은 베다니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는 세례 요한의 체류지로써 성경과 비잔틴 및 중세 문헌을 통해 예수그리스도가 세례를 받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예수님이 세례 받은 베다니 세례터
예수그리스도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직후인 30세에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공적 사역을 시작했다.

지금도 많은 교회에서 베다니를 찾아 세례와 침례 등을 행하고 있다. 기자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도 정교회 청소년들이 침례를 받고 있었다. 청소년들은 2~3차례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며 거듭난 삶을 다짐하는 듯 했다.

베다니는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국경지대에 있어 총을 든 군인이 경비를 서고 있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이다. 강폭이 좁은 까닭에 이스라엘 편의 순례객과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그 밖의 성지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도주하던 중 머물던 브니엘(펠라), 요르단 북부에 위치한 로마 데가볼리, 예수가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가다라(움 카이스), 중동에서 가장 잘 보존된 그리스·로마 도시 거라사(제라쉬), 사해와 롯의 동굴, 로마와 비잔틴교회 등 다수의 유적을 자랑하는 랍바암몬(암만), 에시온게벨(아카바) 등도 요르단의 대표적 성지다.

요르단 성지순례 현장에서 성경의 이야기가 생생히 눈앞에 펼쳐졌다. 먼 옛날 얘기 같던 성경의 내용이 입체적으로 재구성되는 것을 체험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여정, 엘리야와 엘리사, 세례 요한의 사역, 예수님의 공생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요르단 성지순례는 기독교인에게 감동과 은혜를 선사하는 의미있는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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