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거듭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 3:9)

본문은 신학 3년 재학 중이던 필자에게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던 말씀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라니? 게다가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에 범죄 하지 못 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체험, 소위 중생의 체험이 분명했던 필자에게 이 말씀은 충격과 혼란 그 자체였다. 그러면 죄와 늘 싸우지만 결국 생각으로 입술로 그리고 행위로도 죄를 짓고 마는 나는 무엇인가? 나는 진정 구원받은 자인가?

이 고민은 거의 1년 동안 필자를 영적 공황상태에 있게 하였고, 감사하게도 말씀으로 촉발된 고민과 그로 인한 진지한 기도는 결국 새로운 은혜를 체험하는 계기로 이끌어졌다. 이후 원어로 성경을 읽는 능력이 구비된 후에 본문을 다시 대하면서 그 말씀의 본뜻을 더 정확히 알게 되었는데 그 해석의 핵심은 그 시제의 사용에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 완료형
본문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에 사용된 동사는 ‘낳다’라는 뜻의 ‘게나오’()의 완료수동형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명시하고 있는 상태는 하나님에 의해서 낳아진, 바꾸어 말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신 ‘거듭남’의 사건은 과거에 확실히 발생하였을 뿐 아니라 그 결과가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태임을 나타내고 있다. ‘거듭남’이란 성도에게 확실한 체험적인 일로써 현재의 시점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는 사건이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범죄 하지 못하는 것은” : 현재형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를 위해서는 ‘행하다’는 뜻의 ‘포이에오’()의 현재형이 쓰였고, “범죄 하지 못하는 것은”을 위해서도 ‘능력 있다’의 뜻인 ‘두나마이’()의 현재형이 쓰였다. 이 구절과 거의 같은 내용인 3장 6절의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에서도 역시 현재형이 사용되고 있다. 헬라어 현재형이 가지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것으로써 따라서 이 본문의 뜻은 죄를 전혀 짓지 않는다든가, 범죄를 전혀 할 수 없다든가 하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죄를 반복적으로 짓고 죄 안에서 살아가지 않는다. 그런 삶이 불가능하다는 말씀이다.

사실 요한일서 3장 6절이나 9절을 한글로만 읽으면 이미 선언된 요한일서의 여러 다른 말씀들, 특히 1장 8절 이하의 말씀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와 현저히 모순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요한일서 3장 6절과 9절에서 사용된 현재시제의 의미를 확실히 이해하고 본문을 읽을 때 이 구절들 간의 오해와 갈등은 해소된다.

본문은 거듭난 사람이 전혀 죄를 짓지 않으며, 죄를 짓는다면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 아님은 밝혀진 바와 같다. 그럼에도 여전히 본문은 성도의 죄 짓는 삶을 용인하는 구절은 아니다. 오히려 죄와 함께 할 수 없는 성도의 변화된 본성과 거룩한 삶으로의 요청이다. 실로 죄악이 관영한 이 세상 안에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아파하고, 성화와 성결의 삶을 위해 몸부림치는 하나님의 사람들 성결가족이 더 많이 일어나고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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