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우 목사
‘레퓌블릭(공화국) 광장’은 인종·종교를 떠나 프랑스인들이 어울리는 톨레랑스(관용)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이곳을 테러의 목표 지점으로 선택한 것은 ‘관용정책도 테러를 멈추게 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라고 뉴욕타임즈는 해석했다. 프랑스는 이슬람국가(IS) 본거지에 강력한 군사 공격으로 대응을 시작했다.

프랑스의 테러에 대한 강력한 군사응전을 IS가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다. 오히려 그들은 테러 이후 서방의 복수로 무슬림들이 더 강력한 극단주의자가 되는 것을 노렸을 수도 있다. “과격 이슬람극단주의자들에게 전자 팔찌를 채우자”, “이슬람 근본사원을 폐쇄하자”는 의견들도 나오고 있다. 이슬람의 확산을 싫어하는 한 사람으로서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다. 도전과 응전의 반복은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파리가 울고 있던 날 시청 앞 광장도 역사 국정교과서 반대 시위로 울었다. 누가 물어왔다. “목사님은 국정 교과서 찬성, 반대 어느 쪽이세요.” 개인적인 소신이 있지만 피력할 수 없었다.

성도들이 찬반으로 생각이 갈리는데 한쪽의 목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비단 역사 교과서만의 문제가 아니다. 남과 북, 동과 서, 경상도와 전라도, 주류와 비주류, 진보와 보수로 대립하며 대한민국은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

IS의 파리 테러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프랑스의 군사적 응전을 반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평화를 사랑하는 무슬림들까지 테러리스트로 내모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을 흑백논리로 반으로 나눠 서로 공격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 아니다. 대화와 화해를 위한 자리에 마주 앉아야 한다. 응하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는 희생적 노력은 더 큰 테러를 막을 수 있다.

평년 기온을 웃도는 늦가을이지만 여러 비극적인 사건들로 더 춥게 느껴지는 가을, ‘뫼비우스의 띠’가 생각난다. 뫼비우스의 띠는 어느 지점에서나 띠의 중심을 따라 이동하면 출발한 곳과 정반대 면에 도달할 수 있다. 계속 나아가 두 바퀴를 돌면 처음 위치로 돌아온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과 밖, 처음과 끝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연결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톨레랑스는 공격받았다. 우리의 톨레랑스도 공격받고 있다. 기실 성결교회의 톨레랑스도 공격받고 있다. 이 공격을 이기고 진정한 톨레랑스로 거듭나려면 뫼비우스의 띠가 되어야 한다.

누구편도 아니고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예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누군가의 독주는 능력으로 보고 누군가의 설움은 위로로 읽고 싶다. 머릿돌과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이고 싶다.

성결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미약한 사람이기에 작은 바람이 하나 있다. ‘어느 쪽’인지 누구도 쉽게 물어 올 수 없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소신 없다는 말을 들어도 하나 됨을 위해 오늘도 한 걸음, 딱 한걸음만이라도 걷고 싶다. 누군가로부터 공격과 견제가 시작 된다 할지라도 반응하지 않고 오롯이 하루를 살고 싶다.

때론 정당하게 주어진 기회도 양보하며 누군가를 세워주는 사람이고 싶다. 불같은 성령을 받은 자도 존중하며 비둘기 같은 성령을 사모하고 싶다.

다름을 인정하고, 어떤 독특한 사람도 존중하는 목회를 이루고 싶다. 관용의 시험을 넘어선 예수님의 관용의 한 절이라도 닮고 싶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를 존중하며 오늘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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