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용 교수
곧 대림의 절기이다. 모두 행복한 마음으로 아기 예수의 오심을 고대하고 기다리는 계절이 바로 눈앞에 와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어수선하다. 아니 곳곳에 잡음을 넘어 폭음과 굉음이 진동하고 있다.

IS의 휘하 세력이라 여겨지는 이들이 자행한 파리의 테러는 유럽을 위시한 전 세계를 공포와 불안의 도가니로 몰아가 버렸고, 11월 14일 서울 한복판에 있었던 10여 만 명이 모여든 대규모 시위 역시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는 커다란 울림이 되어 한반도를 흔들고 있다.

그러나 그런 차분한 분석보다 먼저 우리를 찾아오는 것은 불안과 공포요, 그에 따른 혐오증이다. 폭력의 주동자를 아예 발본색원해야 한다는 이들도 있으며, 당한 것보다 몇 배나 더한 폭력을 불특정 다수에 쏟아 붓기도 한다. 그렇게 퍼부어진 보복대응은 더 큰 폭력의 모습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어렵고 힘들게, 그리고 고통스럽게 만든다.

도대체 어떻게 이 상황을 이해하고 소화해야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폭력을 치워버릴 수 있을까? 역시 문제는 소통이다. 폭력은 막힘에서 시작된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때, 사람들은 종종 ‘폭력’으로 ‘소통’을 시도한다. 서로가 소통하며 이해하고 있다면, 우리는 인간의 얼굴을 유지한다. 하지만 소통이 단절되고, 정보가 일방적이 되며, 한쪽의 목소리만 으름장이 되어 전달될 때, 우리는 절망하고, 체념하고, 눌려지고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소통을 위해 고안된 세상의 여러 기제와 방법을 동원해 보지만, 그것마저 제대로 작동되지 않으면 이내 자포자기 상태가 되고 만다.

그때 우리는 인간의 얼굴을 잊어버린다, 아니 더 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혼자만의 벽속에 갇힌 채 더 이상 세상과 인간을 소통 가능한 대상으로 보지 않으려 한다.

그런 불통의 벽에 둘러싸인 사람은 자신 이외의 남을 더 이상 ‘그’나 ‘그녀’가 아닌, ‘그것’으로 몰아세워 버린다. 이제 그의 생활세계에서는 더 이상 심장과 인격을 가지고 소통할 수 있는 대상이 자리하지 않게 된다.

그러니 그들은 아무런 갈등이나 주저함 없이 폭력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 불통이 만들어낸 끔찍한 귀결이다. 그러니 들어야 한다. 눈을 열고, 귀를 뚫어 이웃의 이야기, 특히 약하고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에 민감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도 타락한 세상을 징벌이 아니라 아들을 보내 소통을 통한 구원의 자리로 초대하셨듯이, 불통을 치유하고 이겨내는 방법은 ‘사랑의 소통’뿐이다.

세상이 여전히 시끄럽고 폭력이 진동하며 화약 냄새가 가시지 않고 있다면 그건 그만큼 누군가 간절히 소통하길 원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눌려지고 답답한 마음 끝에 내뱉은 신음소리에 누군가는 자애롭고 섬세한 들음의 용기를 보여줘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저마다 자신의 사연만 절박하고 마땅하다 하여 상대방의 이야기에 눈 닫고 귀 막는 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 폭력은 좀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불통은 폭력을 불러내고, 또 키워내는 자양분이 된다. 따라서 이를 끝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소통의 문을 열어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소통의 깃발을 들어야 할까? 누가 세상의 아픔에 민감하게 다가서야 할까? 어쩌면 세상은 불통의 모습으로 소통의 절규를 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절규에 사랑의 손을 내밀어야 할 주체는 결국 교회이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어 세상과 소통했듯이 교회도 제 목소리 내는 것에만 빠져 있지 않고, 이제 세상의 아픔과 신음소리에 사랑과 소통으로 반응하며 불통의 시대를 치유하는 통로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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